아침에 벗님이랑 얘기하다가 문득 깨닫고 서로 고마워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관계는, 실제로 상대와 하루 중에 마주치는 순간이 단지 몇 분 밖에 안되고, 한달 일주일 내내 모아봐도 채 몇시간 안될지도 모른다. 마주치는 몇분 이외의 모든 시간은 홀로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하루에 그 몇 분이 하루종일 우리를 묶어놓는다면, 어쩌다 마주친 그 잠깐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묶어놓는다면, 그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생각의 문제가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상대와 상관없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내 삶을 살고, 단 몇 분 마주칠 때는 이전의 역사를 내려놓고 오로지 그 순간에만 최선을 다해서 잘 마주하면, 스스로 지은 생각의 감옥에 스스로를 묶어두느라 새어나가고 있던 생기를 자신의 삶을 가꾸는 쪽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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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이가 두발자전거를 탄다. 2주만에 봤더니 또 컸다. 꿈터에서 선유네집 언덕 밑까지 밤마실 가는 길에 한결이 자전거는 한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결이를 따라 헉헉헉 심폐를 단련하면서 간다. 마침 달은 보름달.


"우리 한결이 언제 이렇게 또 커서 두발자전거를 다 탈 수 있게 됐지? 저번에는 두발자전거 안탔었잖아? 너무 신기해. 우리 한결이 자전거 타는 거 봐서 너무 좋고, 같이 보름달 보면서 밤마실가는 것도 너무너무 좋다. :-D"


"나도 좋아 엄마! 아빠가 붙잡아줬는데, 한달이나 걸렸어. 엄만 하나도 몰랐지? 근데 보름달, 밤, 밤마실, 두발자전거, 전부 다 ㅂ 이 들어간다 그치?"


"와 >_< 어떻게 알았지? 한결 대단한데! 그렇네 전부 ㅂ이 들어가네!"


와, 이렇게 글자놀이도 한다 :-D 낮에는 받침 있는 글자를 좔좔 읽는 걸 보여주고, 연습장을 펼쳐서 받아쓰기 백점맞은 쪽도 보여줬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자기 이름 석자부터 시작했는데 두달 남짓 지나는 동안 다른 글자도 다 읽고 쓰게 된 거다. 배울 때를 만나서 배우게 된 것을, 배운 그 때에 바로 바로 익혀나가고 있는 한결이가 어찌나 기특하고 장한지.


얼룩얼룩한 옥토끼 그림자가 다 비치는 쟁반 보름달을 본다. 낮에 홍범식고택에 전래놀이하러 가서 땀 뻘뻘흘리면서 비석치기하고 집에 돌아와서 싹 씻어서 개운한데다 선선한 밤바람이 분다. 막 두발자전거를 배워서 조심조심 타는 내 아이, 글씨를 배운 이야기를 상냥하게 재잘재잘 나눠주는 내 아이가 옆에 있다.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사랑하는 벗님들 얼굴보러 밤길을 걷고 있다. 오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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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발표 하나를 마치고 왔다. 세미나 발제다. 이번 주만 세번째다. 한번 두번 잔뜩 긴장했다가 긴장 안한 상태로 돌아와보니, "평소 말하는 것처럼 하는" 상태가 어떤건지 알겠다. 평소 말하는 것 같이 하면 까먹고 말하지 못하는 건 적어지겠다. 살짝 감도는 정도의 긴장이라면 이야기에 집중하는데도 도움이 되겠다.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시작부터 끝까지 꿰고서 차근차근 차례차례 할 말을 하고, 그러다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부리면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과 교감하는 순간은, 돌아보니 엄청난 쾌락과 닿아있는 것도 같다. 이야기 하는 쾌락. 사람들이 주목하는 자체가 긴장이라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몰아닥친 세번의 발표를 지나면서 보니 거기에도 즐거움이 숨어있었다.




매주 관문학당 한의학 강의를 마치고, 수업 같이 듣는 사람들이랑 도담샘이랑 뒷풀이겸해서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 이번에는 "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을 나눠서 발제하기로 했고, 나는 5장 6장을 맡았다.



긴장했나? 수업 전에 저녁으로 김밥을 먹는데 먹자마자 덜컥 체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쪽지시험, 수업 마치고 발표 있다고? 뭐, 아랑곳 않는다. 끝까지 다 먹었다. 체하면 언젠가는 내려가지만 안먹으면 배고파서 힘이 없으니까. 밥때 밥을 안먹어서 배고프면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목소리도 후들후들 떨린다. 후들거리는 손과 목소리로는 뭘 할 수가 없어서 곤란하다. '배고픈 것보다는 체하는게 낫지.' 하면서 긴장한 채로 우적우적 잘도 먹는 내가 너무 웃겼다 ㅋ


발제 발표는 무사히 마쳤고, 역시나 내가 말할 수 있는 만큼이 내가 아는 만큼이라는 걸 한번 더 확인했다. 모르는 걸 읽는 발표가 아니라 아는 만큼만 말하는 발표를 몰아서 두번 하고 나니 이제야 감이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다. 나를 만나러 다가온 텍스트를 가장 잘 맞이하는 방법은 텍스트가 내 몸을 통과해서 다른 소리로 나오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지. 말이든 글이든 말이다. 세미나에서는 발제를 맡은 건 그 경험 속으로 나를 밀어넣은 것이었다. 읽은 것을 모두가 듣는 데서 이야기하려니, 혼자만 알면 되는 책읽기 할 때보다 더 자세하게 읽는다. 중요한 부분을 한마디로 압축할 단어를 고르고, 소단원부터 대단원까지 하나로 엮어낼 절정의 문장을 궁리한다. 그러니, 모두 같은 책을 읽지만, 마음의 부담과 고통을 감당해내면서 자세히 읽고 잘 꿰어서 전하는 사람이 텍스트를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스페셜 챤스"를 얻은 것인 셈.


A4 앞뒤로 한장짜리 요약본 발표를 앞두고 긴장해서 김밥 한줄도 다 먹기 전에 덜커덕 체하는 주제에, 다음에 기회가 오면 또 하겠다고 손들고 싶어서 일기를 쓴다. 다음에 할 때는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




행복에 대한 이야기.

 


5장은 시들해지지 않을 방도를 이야기한다. 어떤 자극이든 어떤 행위든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어 시들해지고 만다. (한계효용 하락, 쾌락적응) 그러니 삶의 정점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두고, 시간차를 두고 누리는 것이 행복을 누리는 한 방법이다. 그 정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좋다는 도담샘 코멘트. 그리고 예를 들어 음악이나 글쓰기처럼 끝이 빤히 보이지 않고, 정복되지 않는, 완성되지 않는, 오히려 되풀이 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끼는 나의 관심 분야를 찾아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시간의 한계를 지금 한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르는 미래로 가정하고 진지하게 사는 것도 한 방법.


6장은 기대와 만족의 관계다. 기대감이 바로 충족되는 삶이 아닌, 기대할만한 것들이 존재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삶이 행복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 뇌의 전두엽의 역할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정신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인데, 그 기능은 바로 앞날을 상상하고, 기대하고, 계획과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희망이 아닌, 기대감. 기대감을 갖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일 수 있고, 삶의 큰 선물이다. 그 기대감을 오래 끈기있게 시간을 두고 유지하는 능력이, 행복할 수 있는 힌트.


내 행복은 지금 일상 안에 다 들어있다. 1주일, 2주일, 공부하러 가는 주기에 맞추어서 기대와 기다림으로 가득 차있다. 이 나날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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