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지각을, 머리카락 잘라내듯이 잘라서 내다 버리기로 했다!



지각하지 말자고 결심하는 건 모든 시간약속 앞에서 똑같다. 안 늦고 싶다. 늦고 싶어서 늦는 것은 아니다. 긴장하고 한참 전부터 준비하는데도, 어째서인지 늦고야 만다. 크게 늦는 것도 아니고, 자잘자잘하게 3분에서 5분정도로 늦다가는, 긴장 풀리면 어느날 왕창 늦는다. 왕창 늦은 걸 반성하고 새사람이 된 듯 한두번 제시간에 가다가 슬며시 늦다가 다시 왕창늦고 자책한다. 다시 바짝 긴장하고, 새로 시작하기를 반복이다. 작심삼일도 이런 제자리걸음형 작심삼일이 없다. 


벗님한테 지각하는 습관에 대해서 한마디 한마디 눈물이 쏙빠지게 제대로 혼나다가 어떤 부분을 확 알아들었는데, 나는 '늦지 않으면 된다'고, '어쩌다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못보고 그저 나 하나만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 그랬다. 물한대접에 물방울 하나 더해지는 것 처럼 그저 나중에 더해지는 물방울 같은 존재로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저 늦으면 늦어서 안좋고 안늦으면 안늦어서 다행인 걸로만 여기고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관계를,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까지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뭘 빠뜨렸나' 꾸물럭 꾸물럭 돌아보면서, 몇분에 출발하면 안늦고 몇분이면 늦고에 신경쓰다가 늦는다. 늦던 안늦던 '늦는 것'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늦는 것만 생각하니 늦는 것이었을까.


"이러이러 한 것이 당연하다" 혹은 "해야만 한다" 는, 고통스럽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반발이 일어난다. 당연하다는 이유가 내 행동의 방향을 묶어두는 순간, 발 묶인 꽃사슴 한마리가 된 것처럼 전속력으로 벗어나고 싶어진다.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행동이 의미가 있고 좋다는 걸 자꾸 마음에 그리고 기대하고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좋은 마음이 우러나와야, 내가 바뀔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일찍 가서 좋다. 일찍 가서 생겨나는 좋은 것이 이미 공부의 시작이다."는 쪽으로, 아예 시간을 인식하는 틀을 바꾸어야겠다.


일찍 가면 공부하기 전에 책상배치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간식준비하는 것도 도울 수 있다. 잘지냈냐고 웃으면서 인사도 할 수 있다. 그저 나중에 더해지는 물방울 하나가 아닐 수 있게 된다. 달려라 하니가 되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으로 뛰고, 강의실 문 앞에는 여는 소리가 안들리도록 쥐도새도 모르게 열고 기어들어가는게 아니라, 차분하고 우아한 자세로 앉아 출석부를 때 방긋 웃으면서 "네!" 하고 대답할 수도 있다. 버스타고 학교 오가면서 무릎위에다 단어장을 펼쳐놓고 외운 논어문장을 토씨하나 안틀리고 낭송할 수도 있고, 삐뚤빼뚤 일주일을 그려가면서 외운 한의학 한자를 한글자도 안빼고 쪽지시험에서 다 써낼 수도 있고, 보석같은 문장에 밑줄그으면서 읽어간 단편소설에 대해서 "읽은 느낌이 어떠냐"는 선생님 질문에 서투르게나마 대답도 할 수 있다. 이건 전부 수업 첫머리에 이루어지는 공부다.

그날 공부할 걸 미리 훑어보면서 수업을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호기심을 키울 수도 있다. 고 틈새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몇장 더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다음부분 읽을 때까지 사이시간에 궁금한 마음이 커져서 다음 틈새시간에 책을 폈을 때 이야기가 스폰지처럼 빨려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재미있어서 하는 공부는 벗님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꺼리가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를 몸에 가득 담아두어서 입만 열면 웃겨주는 내가 될 수도 있는 시간이겠다.


배가 고프면 밥이 맛있는 것 같겠다. 어떤 일을 하려고 시간약속을 했을 때 그 일을 가장 즐겁고 의미있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내 마음이 그 시간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겠다. 일찍 간다는 건, 예열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 그것부터 공부고, 그게 공부고, 그것이 나에게도 선물이고,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선물이고, 나를 만나는 모든 이에게도 선물이겠구나, 싶다. 이런 일에 "마음을 다한다"는 표현을 써야겠구나.


도서관에서 모임과 강좌 준비하던 마음을 늘 떠올려야겠다. 일인데 일이 아니었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과 선생님을 잘 맞이하고 싶어서 구석구석 쓸고 닦고, 책을 정리하고,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면서, 함께 공부를 시작하는 시간이 오기를 두근두근 기다리던 그 기쁜 마음이 열쇠겠다. 언니님들이 도서관 행사를 준비하는 내가, 지각 하나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ㅋ

단지 늦지 않는 것보다 한발 더 나가서,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나부터 기뻐지는 마음이, 제자리걸음 작심삼일의 궤도를 탈출해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힘이겠다.



써놓고 보니, 일찍가서 좋은 일이 이렇게 많은 걸 못보고 있었네. 이런이런. 호되게 혼쭐 내준 벗님께 무한한 감사인사를.



일찍가서 좋은 일을 잔뜩 만들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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