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세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덕은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올라올 수가 없어서, 내려서 걸었다. 그런데 어? 내려서 걸으니까 수월하다.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는 절벽같던 경사가, 오르막길이, 내려서 걸으니까 평소에 걸어다니는 길같은 그냥 길이었다. 아주 걸을만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려고 했던 것이 힘든 이유였다.

끙끙거리면서 올라갈 때, 괴산에 두고 온 전기자전거가 계속 생각났다. 자꾸 비교됐다. 이정도 언덕은 수월하게 넘을텐데. 고쳐서 가져올까.

또, 사람들이 이래서 가벼운 프레임과 바퀴와 세밀한 변속기어를 중요하게 보는구나 했다. 아까 거의 엎드리다시피 타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사람들처럼. 평지에서도 언덕에서도 내 옆을 슁- 하고 미끄러져가는 그 힘 ㅋ 마치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그런 자전거를 사야겠다" 하는 목표가 나타난 것처럼, 더 성능 좋은 자전거가 그 다음이 될 것처럼, 지금 타고 있는 자전거는 거쳐가는 과정같아보였다. 언덕 오르기 힘들다고, 벌써 과거와 미래를 결정짓는 쪽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오늘 처음 타고 나온건데.


그냥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거였다. 산을 넘는 것도 아니니 사실은 길지도 않은 오르막이고, 걷는 걸 좋아하니 걷다보면 아쉬울 정도로 일찍 끝난다. 그럼 금방 또 내리막길이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완벽하게 쉽게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고려하고, 알아보고, 비교하고, 그만큼의 비용을 들여서 사고, 계속 관리해야 한다. 나는 거기에서 자유다. 얼른 내려서 즐겁게 걸으면 된다. 오르막이 좀 나타나야 내려서 걸을 수 있는 거였다.

평범한 자전거로도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는 데는, 게다가 걸을 수도 있어서 내게 너무나 완벽하고 충분하다는 걸, 내려서 세걸음 걷는 순간 알았다. 걷는 순간도 행복하다. 걷는 순간이 행복하다. 언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 없이 그냥 걷는 순간에 나는 무척이나 행복하다. 자전거도 타고, 걸을 수도 있다니! 지금 이거, 너무 굉장하지 않아.

평범한 자전거가 주는 놀라운 행복이 줄줄이 기다린다. 관양도서관도 가고, 문원도서관도 가고, 인덕원역 과일가게에 과일도 사러가고, 대공원 너머 경마공원도 가보아야지. 가끔 언덕이 나타날 때 내려서 슬슬 걸으면, 힘들어서 못간다고 하는 곳이 없겠다.

느긋한 자전거 라이프, 홧팅 :-D


+

새벽 3시 반, 집에 돌아오니 32도다.
1도나 떨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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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 집 안은 섭씨 33도다. 것도 창문을 다 열어놓은 베란다 쪽이 33도다. 방 안쪽은 더 더운 것 같다. 이제 시작이다. 5층 꼭대기인 우리집은 지금부터 12시까지 점점 더 더워진다.


선풍기는 그냥 평범한 선풍기가 아니다. 선풍기 모양을 하고 있는 사우나 메이커다. 뜨뜻한 바람이 닿은 맨 등짝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노폐물이 빠져 나가고 고운 피부가 될 수 있는 미용기기였다.


오늘 도착한 자전거를 핸들이랑 페달을 달아서 조립하는데, 땀이 후둑 후둑 떨어진 것이 모여서 발 밑에 물컵 엎지른 것처럼 땀이 고였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얼른 공부짐을 챙겨서 집을 탈출했다. 헉, 집 밖도 숨이 막히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과천에는 24시 카페가 없다. 도서관 열람실도 12시에 닫는다. 집 식을 때까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ㅠㅠ 분노의 검색질. 지하철 한정거장 떨어진 인덕원역 근처에 새벽 3시에 닫는다는 카페가 있다. 어서 가서 한글자 더 읽자. 출발!


정부청사역에서 안양쪽으로 낑낑 헉헉 고개 하나를 넘어, 인덕원역 동편마을 입구를 향해 간다. 선풍기와 마찬가지로, 자전거도 바구니 달린 평범한 여성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오르막길에서는 고가의 클래식 자전거 겸 스피닝 싸이클이다. 평범한 자전거처럼 7단 변속기어가 달려있지만 오르막길에서는 마치 기어 없는 1단 클래식 자전거인 것처럼 잘 나가지 않는다. 덕분에 젓가락같은 나의 허벅지를 말처럼 아름답고 강하게 단련할 수 있다! 좋아!


오르막의 정점을 찍고, 긴 내리막길을 눈썰매 타는 것처럼 내리달린다. '우와아악-- 아하하!' 신이 났다. 얼굴에 대놓고 바람이 불어서 땀이 다 마른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었어. 내리달리는 속도가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무서울만큼 빠를 때, 문득 '이따 새벽 3시에 이 길고 가파르고 높은 언덕을 이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어떻게 다시 올라오지;;'  



20분 걸렸다. 카페 안에 들어오니 정신이 든다. 이 큰 카페에 내가 앉을 자리 딱 하나 남아 있고 모든 자리가 차있다. 문닫을 때까지 있어야지 :-D 오늘 밤에는 잘 수 있겠지 +_+ 3일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못잤으니 오늘은 노곤함이 쌓여서 아주 기절하는 것처럼 달콤하게 자면 좋겠다. 내일도 괴산에 가서 내사랑 어린이들이랑 춥도록 물놀이하고 시원하게 자야지. 그리고 돌아와서 낼모레 입추가 지나면 좀 시원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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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마치 목이랑 가슴팍이랑 등이랑 엉덩이에 언제 돋았는지 모르는 사이에 돋아있는 산딸기 모양 땀띠처럼, 길어있다. 일 마치고 돌아와 씻고, 씻자 마자 다시 땀에 젖어버리는 콘크리트 꼭대기층 집을 탈출해서, 덜 마른 머리를 풀고 밤산책 가던 길에 알았다. 장맛비가 막 쏟아지기 직전의 바람을 맞으면서다.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살랑, 귀 옆을 지나 어깨 뒤로 넘어가서 사락사락 바람을 타다가, 바람이 멈추면 사르르 귀 어깨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살랑, 목 뒤로 가서 사락사락 날리다가 사르르, 어깨 앞으로. 토끼꼬리만큼 묶이던 댕강머리가 여름 지나면서 이렇게나 길었다.


좋구나. 바람에 머리카락 나는 기분. 파리 세느강 퐁네프 다리를 걷거나, 속초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거북이섬을 보면서 모래를 밟거나, 제주 협재해변에 물이 빠진 바다를 맨발로 걸을 때도, 여름 밤바람을 맞으면 이렇게 머리가 살랑대겠지. 머리카락은 살랑이고, 여기서도 나는 걷는다. 마음도 발걸음도 같이 살랑살랑. 땀띠도 오늘 더위 견디느라 애썼다고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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