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녹내장 정밀검사를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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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녹내장을 이겨내는 사람들'에서 어떤 글에서는 초기정밀검사비용이 60만원이래서 깜짝 놀랐고 (몇년 전 글이다), 강남에 친절하고 잘본다는 이름난 병원의 이름난 의사한테 진찰받는데 비용이 30만원을 육박해서 놀랐고, 전화해봤더니 그 의사를 만나려면 몇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또 놀라고, 같은 병원에 덜 유명하고 잘 봐주는 다른 의사를 만나려고 해도 일주일을 기다리고 비용이 20만원을 육박해서 놀랐다. 


그리고 녹내장은 딱히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서 안약넣으면서 진행을 늦추는 것이 치료의 전부라는 것에 움찔 했고, 그러면서도 정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면서 계속 검사를 해야한다는 것에 흠칫 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첨단장비가 다 갖추어져있는 큰 병원의, 정성스럽게 봐준다고 소문나서 여러사람이 진찰받고 있는, 추천 리스트에 있는, 그 의사선생님들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나도 거기에 줄을 서야 안전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별별 병원의 별별 의사를 폭풍검색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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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고 일어나서 아침.


눈뜨고 앉아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전문이라고 이름난 병원을 찾아 너무 멀리 가는 것도,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비용을 쓰는 것도, 그리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는 못한다. 생각만으로도 지쳤다.


녹내장인지 아닌지, 녹내장이라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지금 상태를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혹시 녹내장이라고 해도 스테로이드 들어간 안약을 평생 넣는 길을 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검진은 받되, 검진을 받는 것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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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은 100명중에 4-5명이 발발한단다. 그리고 작년부터인가, 녹내장을 진단하는 기기에 보험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치료법은 딱히 없지만 병 자체가 드물고 희귀한 병도 아니고, 아주 발견하기 까다롭고 어려운 병도 아닌 것이다.


녹이사 카페에서 얻은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검사의 실제 내용도, 비용도, 판정하는 기기의 이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굳이 큰 대학병원이 아니어도 그정도 장비를 갖춘 곳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거였다. 


과천 바로 아래 안양도 꽤 큰 도시라, 동네에서 유명한데가 있겠지 싶었다. 잘본다는 1차병원 안과를 동네 커뮤니티에서 검색해봤다. 웬만한 대학병원에 있는 검진기계는 다 있다. 전화해보니 예약도 필요없고 오면 바로 검사받을 수 있고, 두시간 정도 걸리고, 검진하는 비용은 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다 해서 8만원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이거다. 자전거를 슬슬 타고 고개 하나를 넘어 인덕원을 지나 병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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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병원인데도 꽤 큰 안과다. 처음엔 시력 안압같은 기초검사를 하고, 원장선생님이 환한 불을 비춰서 내 눈을 안쪽을 보고는 "시신경 모양이 그리 좋지는 않다. 한번 보자." 했다. 그리고 정밀검사. 별별 기기에 다 앉아서 별별 검사를 다 받았다. CT같은 것도 찍었다. 그리고 원장선생님이랑 결과 보면서 이야기했다. 


결과는, 정상. 방심할 수 없는 정상. 정상인 그래프와 녹내장 환자의 시신경 그래프가 있는데, 나는 정상의 밑바닥, 녹내장 판정 바로 위, 그 사이 아슬아슬한 어디쯤에 있었다. "그래프에 따르면, 시신경이 정상 기능을 하고 있다" 고 판정해주셨다. 그래서 최종 결론은 정상 :-D 


살았다. 괜찮다. 하하하하하하! 


관리 더 잘해야지. 구기자를 넣은 보중익기환도 잘먹고, 산책도 날마다 시간내서 하고, 밥도 영양가 생각해서 제때 잘 챙겨먹고, 혈액이 잘 만들어지게 밤에 일찍일찍 자야지. 안구운동도 할테다. 잘 아껴줘야지 내 눈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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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검진 비용은 77,600원. 검사하는데 필요한 두시간 정도와 이만큼의 비용이면, 내 눈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간호사님은 내가 실제로 녹내장 판정이 나오면 보험이 더 적용되어서 검진비용이 5만 얼마 나올거라고 했다. 녹내장이 아니어서 돈을 더 냈어도 정상범위로 나와서 좋다 :-D 결과는 CD로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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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슬슬 집으로 오다가 인덕원역 야채가게에서 한바구니에 오백원 천원에 떨이하는 걸 몇바구니 샀다. 가지랑 단호박이랑 연근이랑 (허샘이 생각나는) 옥수수. 야채가게 청년이 검은 봉다리와 함께 오천원을 거슬러주면서 뜬금없이 "손에 봉숭아물 예쁘게 들이셨네요" 했다. 하, 알아봐줘서 기쁘다. 이런 센스쟁이 청년같으니. 방금 마지막 연근 두봉지를 옆의 여사님이 망설이는 사이에 "제가 살께요!" 하고 격투하듯이 싹쓸이한 노여사를 보고서도 이렇게 예쁜 말을 건넨다. 나에게 단골의 싹수가 보이는가! 단골이 되어야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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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루를 원했다. 걷거나 자전거타고 다녀올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 내가 잘 모르는 전문적인 어떤 영역에, 두려움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치르지 않는 것.


하루도 슬슬 지나갔다. 잘 지나갔다. 오늘도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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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에 눈뜨면 9시까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7월 8월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흠뻑 땀흘리면서 일했던 알바를, 내일부터는 안가도 된다. 오늘로 끝났다. 


물한모금 마실 틈 없이 조리도구를 씻고, 야채를 씻어서 다듬고 썰고, 도시락 반찬을 담고,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몇백개의 도시락통을 씻고 도시락 가방을 빨고, 해가 질때 쯤 머리속부터 팬티까지 다 젖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치열한 시간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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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경험이었다. 당장 계란말이 모양과 연근조림 우엉조림의 때깔이 달라졌다. 파프리카 다지고 쪽파 송송썰기가 빛의 속도가 됐다. 많은 설거지하는 것이 힘들지 않고, 50인분의 밥을 하는 물의 양도 잘 맞추고, 양파 대파 나물 다듬고 칼질하는 일이 두렵지 않다. 일하면서 비로소 잠재력이 드러난, 꽈리고추 꼭지따기 신동 & 감자까기 신동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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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조금 감동한 것은, 여기서는 감자 한알 까고 양파 한개 써는 것도 노동의 비용을 쳐준다는 것. 하루 일이 끝나면 서로 "너무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는 것. 집에 있을 때는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시간을 정성들여 했어도 내가 쥐고 쓸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화폐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그동안 네가 한게 뭐가 있냐. 너는 아무것도 한게 없다."고 했다. 


하는 일의 종류는 비슷한데 대우 받는 것이 너무 다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지금도 계속 생각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7년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한게 뭐가 있냐"는 말. 집안일을 해온 경험이 있어서 세포에 집안일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면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텐데. 집안일과 아이 키우는 일의 가치와 수고를 눈으로 봐서가 아니라 몸으로 해봐서 알면 그렇게 얘기하지는 못할텐데. 


아마 남편도 내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용돈도 주고 싶었을테고, 수고가 고마운 적도 있었을테지. 나한테 직접 말해준 적은 한번도 없지만.


여튼 진심으로 "수고했다"고 마음을 말로 표현해주기를 잘하고, 집안일도 당연히 자기 일로 여기고 같이 할 사람이면 모를까, 역시 결혼 따위는 안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수거하고 걸레를 빨아 자기 방과 자기 책상을 닦으면서 사는 남자가 아니면, 결혼은 안하는게 좋을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스스로의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과 함께 상대에게 짐이 될 수도.


어쨌든, 나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잘 생활하고 있고, 외로움도 공부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벗이 되었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내 일을 가지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참 대견해한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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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일주일은 눈뜨면 밥먹고 도서관 가서 공부만 해야지 >_<' 하는 생각에 설레서 잠이 안온다 ㅠ_ㅠ 일기 얼른 쓰고 다시 누워야지. 이번주 화요일 퇴근길 인문학 수업이랑 목요일 관문학당 수업에도 일찍 갈 수 있겠다. 저녁밥도 먹고 갈 수 있다. 이제 노곤하고 허기져서 졸지도 않겠다 야호!


그 다음주 월요일, 그니까 8월 마지막주부터는 2016년 후반기의 또 다른 치열함 속으로 들어간다. 문헌정보학 개강. 평생교육원 연암 읽기 개강. 글쓰기 공작소 개강 :-D 


공부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알바는 계속 해야 될 것 같다. 다음엔 어떤 일을 하면서 뭘 배울까. 다음학기의 공부는 어떨까.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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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관문학당 한의학 수업날. 일 마치고 얼른 씻고 가도 지각을 해서, 매주 맨 뒤에 앉게 된다. 전엔 앞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았더랬다. 안경 도수가 낮아서 (안경 쓰고 0.4, 렌즈 끼면 1.0) 맨 뒤에 앉으니까 칠판 글씨도 안보이고 선생님 얼굴도 안보여서, 공부에서 멀어진 것도 아닌데 마치 멀어진 것처럼 서글펐다.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렌즈를 끼고 갔다. 역시 맨 뒷자리에 앉았지만 하, 오랜만에 신세경. 안경 안쓰니까 너무 너무 좋다. 5분에 한번씩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는 수고도 없고, 더워서 김이 차서 눈 앞이 흐려지는 일도 없고, 참 잘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원한 화각. 안경 프레임이 보여줄 수 있는 구획 안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분별 없는 시원한 풍경이 너무 좋다.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 한눈에 다 들어오는 세상은, 광각렌즈로 찍은 파노라마에다 3D 입체가 더해진 것 같다.

다만 렌즈를 끼면 눈이 좀 많이 뻑뻑하다. 뻑뻑한데다 이물감이 더해져서, 눈을 깜빡이기는 커녕 뜰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메마른 순간, '이건 내 눈을 갉아먹는 편함이구나'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원점.

수술같은 건 무서워서 엄두도 못낼 뿐더러, 조건도 안된다. 검사결과, 나는 원추각막에, 안구 크기도 동공 크기도 보통 사람보다 더 크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게 왜 위험한지 이유를 얘기해준 것 같기도 하다;; 기억안난다;; 아마 레이저 조사 범위가 넓어져서 위험하고, 원추각막의 우려가 있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범위가 넓어져서도 위험한 건가, 폭풍검색해보고 미루어 집작만 한다.), 각막도 라섹이 불가능할 만큼 얇고, 초고도 근시에, 난시까지. 진행중인 녹내장도.

써놓고 나니 세상에나, 내가 보는 세계는 어쩌면 환타지나 SF 아닌가. 눈을 뜨고 걸어다니고, 사람 얼굴을 보고, 글을 읽고, 미세한 색의 차이를 구분하고, 악보에서 음표의 높낮이를 읽고, 건반의 흰색과 검은색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침뜸이랑 한약으로 근시도 치료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던데. 한 3일 전부터 혈자리 찾아서 지압하고, 날마다 결명자차를 마시고, 구기자가 들어간 보중익기환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압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이런 정도로는 택도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때 중국인 한의사한테 근시치료침을 맞아봤다. 일주일에 두번씩, 두달이던가. 눈은 시원했지만 정작 시력이 좋아지는 건 모르겠더라. 아니면 더 나빠질 걸 늦추어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떨까. 작정하고 눈이 좋아지는 습관을 새로 만들면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안경을 벗을 수 있는 만큼의 치료와 습관은 얼만큼이면 될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 내 몸을 가지고 새로운 실험을 할 과제가 또 하나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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