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같은 꿈을 꾼다. 대부분의 꿈은 막 깨어나서 생생할 때 바로 글로 적어놓지 않으면 몇분 안에 꿈을 꿨는지조차 사라지고 마는데, 어떤 꿈은 하도 되풀이해 꾸어서 적지 않아도 기억난다. 요새 꾸는 꿈도 그래서 기억나는 꿈이다.


나는 어스름 저녁, (해방촌 같아 보이는) 도시의 동네길을 산책하고 있다. 임신 8개월쯤 되는 배 모양을 하고 조심조심 걷는다. 무릎 약간 아래에 내려오는 임산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누군가 옆에 있다. 내 왼손을 잡고 왼쪽 편에 있다. 손잡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웃으면서 걷는다. 과일을 사러 나왔는지, 2천원어치쯤 되는 검정색 과일봉다리가 손에 있다가 없다가 한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왔을 때는 고구마나 애호박이나 꽁치나 깻잎일 때도 있다. 검은봉다리는 내 손에 있다가 옆사람 손에 있다가 한다.


마음이 놓이고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내 옆의 이도 자신의 사랑을 하겠지. 내가 아닌 타인이 나를 아끼고, 우리가 함께 만든 생명도 소중하게 여긴다. 불안한 두근거림보다, 안심하는 고마움에 더 가까운 기분. 내일이 없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함께 있어서 충분하다. 충분히 고맙다. 별 대단한 일 없이 그냥 밥해먹고 살고 있고 둘이 무슨 말을 해도 좋은 기분. 그 기분이, 꿈을 깨도 남아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행복하고 싶은가. 그럼 어째서 임신한 상태일까. 아직도 사랑해서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이 다하지 않았나. 그 시절을 새로 경험하고 싶은 걸까. 무의식은 자꾸만 자꾸만 이 시간 앞에 세워놓는다. 관계의 시작. 마치 이게 단추의 처음이라는 것처럼. 혹은 이 순간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처럼.


아니면 진짜 아기가 아닌, 뭔가를 낳고 싶은 건가. 조금 더 기다리고 조심스럽게 키워내야 하는 시절에 충분히 머물러, 친구와 이야기하고 웃고 걷고 밥먹으면서 살아가자는 다짐인가.


오늘밤도 그 꿈을 다시 만나면,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한테 오늘 관문학당 세미나에서 들은 나쓰메 소세키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절실함에 부딪혔을 때, 자기 변형이 일어난대. 나 갱부 다시 읽을 거야. 지금 읽는 고양이도 마저 읽고 문도 읽을 거야. 읽고 내가 재밌게 얘기해줄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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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을까?

쓰지 않으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잘 써내고 싶어서.

쓰고 나서 가벼워지지 않고 돌아보면서 또 아프면,
다시 읽어서 안아플 때까지
바닥을 닥닥닥 긁고 후벼파서 더 쓰고
고쳐쓰고
처음부터 다시 쓴다.


오늘 수업에서 만교샘.
"작가가 된다는 것은
효과없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

내가 내 삶의 이야기를 짜는 작가니까.
크게 위험하지 않은 스토리를 짜는데
힘써볼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번번히 보는 이의 예측을 빗나가면서
돌아보면 하나도 의미없는 복선이 없는,
기막히게 탄탄하고 효과적인 서사구조를 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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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어떤 관계에서 막대기가 된다. 나는 말을 들을 줄 알고, 대답을 하고, 눈이 안보이게 웃고, 의기소침하고, 글썽이고,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설레어 하는, 갓 구워낸 호떡처럼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생명인데. 가끔 어떤 관계에서 상대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막대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나쁜 사람이라서는 아니다. 그저 "막대기가 되는 것이 싫다"고 말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입을 벙긋 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진다. 그리고, 곧 온 몸이 아프다. 오래 견디지도 못한다. 다시는 나를 막대기로 만드는 관계 속에 있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또 다짐한다. 


나는 누군가를 막대기로 만들지 않아야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에 대꾸를 해서 대화를 이어가고, 시덥잖은 우스갯소리를 하고, 반응을 돌려주어야지. 내가 그렇게 한다고 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해도, 공기중에 오래 둔 찰흙처럼 마음이 굳은 사람한테는, 스스로 작정하고 마음을 굳힌 사람한테는 소용이 없는 듯.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싫어하고 아파하는 걸 내 앞에 있는 사람한테 하지 말아야지.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생명으로 대해야지. 어쩌다 어쩌다 나마저 굳고 메마를 것 같으면 얼른 물을 더 붓고 반죽을 해서 다시 말랑말랑해져야지.


내가 할 수 있는, 막대기가 되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나와 연결된 사람을 한번 한번 마음다해 말랑말랑한 생명으로 먼저 대하고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겠다. 마음 나눌 수 있는 생명이라는 신호가 돌아오지 않는 걸 알면, 얼른 내려놓아 흘려보내고 기운 아끼기. 부딪혀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이 더디면서 불확실한 길이, 가장 확실한 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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