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층 아저씨가,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한다. 한번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한번은 아파트 재건축 이야기를 하고, 한번은 내 생활패턴을 알려는 질문을 했다. 지나가는데 불러서 "주말에 낮잠자는 시간에 빨래라도 하는지 천정이 쿵쿵 울린다"면서 주말에 내가 언제 집에 있는지를 묻고, 언제 빨래를 하는지를 묻고,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를 물었다. "전 공부하는 학생이라서 주말 낮에는 수업에 가거나 공부하러 도서관 가니까, 저는 아닐거에요. 혹시 그 시간에 집에 있으면 주무시는 줄 알고 신경쓸게요." 하고 말해놓고, 돌아서서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그냥 "네. 알겠어요." 하면 될 걸 그랬나, 싶어서.


방금 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우리집 현관문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 그리고 말소리가 없다. 택배기사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자료를 묶는데 쓸 제본링을 주문한 것이 온 줄 알았다. 택배기사는 한번 문을 두드리면서 "택배왔습니다" 하고, 안에서 대답이 없으면 문앞에 두고 간다. 여기는 대부분 1인 가구의 소형 아파트라서 그런지, 누가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려주지도 않겠다는 서로간의 약속처럼 그렇게 한다. 또 문을 쿵쿵 두드리고 조용하다. 세번째로 문을 두드리고 조용하다. 방에 불이 켜있으니 사람이 있어도 안열어주는 줄 알면 그냥 갈텐데, 안간다. "택배입니다" 하지도 않는다. 세번쯤 두드리고 난 다음의 침묵이 문득, 무섭다. 


네번째 두드리고 "4xx호에요. 문좀 열어보세요." 하는데, 무서워서, 전화기를 비행기모드로 해놓고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다시 두들기면서 "4xx호에요. 안에 계세요?" "4xx호 사는 사람입니다." 하면서 다시 두들기고. 한 10분을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문고리를 잡고 흔들면서, 열어보라고 한다. 끝내 나는 문을 열지 않는다. 다시 조용해지고, 조용한지 5분이 지났다. 내려가는 발소리가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서있을까.


내가 과하게 반응하는 걸까. 그냥 뭔가 얘기하러 온 것 뿐이었을까. 그런데, 나랑 할 얘기가 뭐가 있지? 왜 문을 잡고 흔들고 두드리면서 열번을 넘게 불러댄걸까.


이 집에 누가 사는지 아무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안들리고 아무도 안볼 때 살금살금 다녔어야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

저녁 7시 50분쯤. 책상에 앉아있는데, 베란다에 펼쳐놓은 빨래건조대가 쇠끼리 덜덜덜 마주치면서 떨리고, 베란다 창틀이랑 의자랑 책상이 다 흔들거렸다. 지진이다. 괴산에서도 몇 번 겪어본, 흔들리는 놀이기구 타고 있는 느낌이다.

'제법 크게 흔들리네' 했더니, 몇 분 후에 또 흔들린다. 두번째는 꽤 오래간다. '아직도네.' . '지금도 흔들리고 있는 거지?'

'이러다 아파트 무너지는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문득. 11월부터 이사 나가라 하고 곧 부술지도 모르는 오래된 아파트니, 그런 상황은 충분히 가능하다. '어서 재빨리 나가자. 뭘 가지고 나가나?' 하다가, 중요한게 너무 많고 무거워서 멈칫;; 책들;;;

'무너지고 있으면 피할 수는 있나?'
못피하겠지. 그럼 뭘 가져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소용없다. 

다행히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행히 원전도 터지지 않았다. 월성 원전 1-4호는 90번을 넘는 여진이 밀려드는 가운데 운전을 수동으로 멈추었다고 한다. 집이나 책이나 혼자 있는게 무슨 문제인가. 원전이 문제다. 월성뿐만 아니라 고리원전이랑 전부 멈춰야 되는거 아닌가?


아무튼, 하루는 더 살아도 되나보다.


+


오늘까지로 충분하다, 됐다, 하고
언제든 홀가분하게 갈 수 있게 잘살아야지.
너무 애쓰지 말고 하는 만큼만 하면서.


느닷없는 최후의 순간에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이.

그냥 지금처럼.


그러니까 언젠가 종말이 닥친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는... 

그런 따뜻한 그림은 당분간 내 현실이 아니라는 것.

당분간인데, 기약이 없다. 기약없는 당분간이다.

그걸 똑바로 봐야 상실감에 휘청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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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피워 올리는 꽃을 앙 다물고"  - <아쿠아리우스(최인호)> 중에서.

임신해서 생리가 멈추었다는 이야기를 시의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감탄감탄.



+



달마다 피워올리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 날이 내일이다. 3일 전부터 평소엔 혀도 못대는 달달한거나 밀가루 음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전부리를 와장창 하고, 고기가 잔뜩 들어간 순대국이 먹고 싶어서 순대국 생각을 많이 하고, 성냥개비만한 일에 울먹하고, 서글프고, 서운하고, 몸 전체에 열이 뜨고, 열나서 입이 마르고 목이 잠기고, 밤에 잠이 안오고, 평소보다 더 빨리 지치고, 아랫배가 부풀고, 가슴이 단단하게 몽우리지면서 붓고 아픈 증상이 최고조에 달한다. 3일은 정점일 뿐, 실은 예정일 열흘전부터 감정곡선이 평소와 다르다. 깜깜한 동굴 속에 머리를 박고 아무짓도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힘내고 힘내고 힘내어 움직움직한다. 일기에 엄청나게 "홧팅"을 써댄다. 환절기마다 앓는 감기처럼 달마다 겪는 건데도 새삼스럽다. 때마다 몸과 마음이 낯설다. 꽃을 피워올리는 일에 내 몸 안의 온 우주가 진통을 하나보다. 개화기라 불러주겠다 ㅋ 



+



그래도 청국장을 한솥 끓여놓고 먹고 있어서 조금 수월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 5월부터 예정일이 가까워오면 아침저녁으로 청국장이다. 먹고 싶기도 했지만 때맞춰 먹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마치 목숨이 달린 약을 달이는 것 같은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ㅋ 청국장을 먹으면 확실히 기분이 덜 울렁거린다. 얼마 전 한의학 수업시간에 메주가 안신작용을 한다고 들었다. 익혀서 발효한 콩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걸 몸으로 이미 경험하고 있는 거였다. +_+ 


청국장 말고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데 쓸 수 있는 건 또 있다. 대추랑 밀가루다. 한약 방제학에서 안신제로는 감맥대조탕, 천왕보심단, 산조인탕이 있고, 기허증상에 불면제로 쓰는 귀비탕이 있는데, 이 네 약에 공통으로 들어가는게 대추(혹은 대추씨 볶은 것)다. 대추를 시도해봐지. 파는 대추차는 너무 다니까, 곧 가을에 붉은 대추 나오면 대추고를 만들어서 쟁여둘테다. 감맥대조탕에는 부소맥이라고 밀가루도 들어간다. 밀가루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재료였다. 8월 개화기에는 부추 한단을 몽땅 부추전을 부쳐서 2박 3일을 먹었는데, 지금와서 보니 몸이 살겠다고 부른 거였다 +_+ 


+


오늘은 글쓰기 공작소 수업이 있는 날. 일찍 일어나서 텍스트를 읽고, 일찌감치 집을 나와 수업을 듣고, 만교샘이랑 학인들이랑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경선샘 신입문장반 OT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일기를 쓴다. 울먹할 틈 없이 차례차례 일정이 지나가서 고마운 9월의 개화기.


+




[2006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아쿠아리우스 / 최일호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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