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이랑 온유가 과천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동물원도 가고, 중앙공원 놀이터도 가고, 눈꽃빙수도 먹고, 아주 오랜만에 내가 차린 밥도 먹었다. 


더위가 한풀 꺾였어도 여전히 더웠다. 동물은 호랑이랑 수달 물범을 보고 나서 "리프트를 한번 더타자. 아니면 이제 집에 가자."고 한다. 동물을 보는 것보다 그늘에서 두 녀석이 서로 장난치면서 노는 걸 더 좋아라했다. 


나는 땀을 많이 흘려서 등이 다 젖었는데, 그래도 좋다고, 온유는 내 목을 뒤에서 꼭 끌어안고 어부바를 하고 헤헤 웃는다.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아직도 아직도 아기다. 세상에 누가 또 이렇게 나를 사랑해줄까. 언제까지 이렇게 덥든지 말든지 꼭 안고, 어부바하고, 뽀뽀하고, 내 냄새를 맡는 걸 좋아해줄까. 


한결이는 윗앞니가 두개가 다 빠지고, 아랫니도 두개나 더 빠졌다. 사진찍자고 하니까 너무너무 웃긴 표정을 지어준다. 찍을 때마다 다 다른 표정이다. 나름 엄청 연구해서 연출한다. 

가방에다 책을 다섯권이나 넣어왔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야. 읽으려고 가지고 왔어." 하면서 어딜 가든 넣고 메고 다닌다. 무거울텐데, "내가 들 수 있어. 내가 들께." 한다. 슬쩍 보니 얼굴에 땀이 흐르고 등이 젖어있다. 자기도 무거울텐데, "엄마! 그거 내가 들께. 나한테 줘." 하고 내가 든 짐도 나눠서 들려고 한다. 속 깊은 배려쟁이 ㅠㅠ 착하다 ㅠㅠ

밥을 먹을 때도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 하면서 바로 바로 반응을 돌려준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우와~~~~ 그래?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야?" 한다. 그런 말도 주고받을 줄 아는 한결이의 마음씀씀이에 뭉클, 기뻐한다.


낳는 수고를 잠깐 했을 뿐인데, 이 생명체들은 마주칠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사랑해준다. 잠깐의 수고 그 다음부터는 매 순간이 선물이다. 아이들이 있어서 내 삶이 선물 그 자체다. 너무 고마워서, 생각할수록 먹먹하다. 참 예쁘다, 우리 아이들.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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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근길 인문학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길진숙 선생님 "18세기 조선백수지성 탐사 - 농암 김창협" 시간이었다.

찬방에서 손도 발도 보이지 않게 휙휙 움직여서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날아가서 몸에 물만 뿌리고 바로 나서서, 충무로 남산강학원에 수업시간 딱 30분 늦게 도착.

배고프고, 목마르고, 몸은 나른하지만,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들으면 돼요." 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시는 길샘강의가 넘 잼있어서 두근두근했다. 책을 미리 읽어간 부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는.

책에서 좀 어려운 학술논쟁부분은 대충 읽고 '강의 들으면서 이해해야지' 하고 갔더니, 그 부분 강의부터 곤란해졌다. 한마디 깜빡 알아듣지 못한 순간 눈이 감겼다. 한번 감기기 시작하니까 계속 감긴다.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 같이, 눈과 귀가 아득하다. 눈이 감기는건 어떻게 해보겠는데, 눈과 함께 몸이 기울어서 곤란했다 ㅠ_ㅠ 잘하면 드러 누울 기세 ㅠ_ㅠ 온몸을 주무르고 꼬집고 비틀어서 깨보려고 했는데, 주무르면서 몸이 스르르 기울고 ㅠ_ㅠ 다함께 인용문 한단락 읽고 나니 조용해져서 눈을 떠보니, 책상이 눈동자 2cm 앞에 와있다.


즐거움으로 피곤함을 이길 수 있는 작전은, 꼼꼼한 예습밖에 없겠다. 알아듣는 재미에 잠이 올 틈을 없애야지. 다음주 성호 이익 부분은 미리미리 읽어갈테다. 예습하기, 몸 쓰는 일이 내게 선물해주는 공부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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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어구사력이란, 언어를 통해 자기 삶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분별해 나가는 일이다. 좋은 책이란 이런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문장들로 채워진 책이다. 우리가 어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작가가 사용하는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배운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읽기와 쓰기는,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공부다.


...


나는 오늘도 읽는다.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반드시 밑줄을 그어둔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어 보거나 따라 써본다. 그리고 틈을 내어 내 글을 써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 다른 관점이 느껴지는 다른 문장을 찾아내고자 애를 쓴다.

다른 사람의 책에서든, 내가 쓰는 글에서든, 때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멋진 문장을 발견하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 문장은 그냥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의 빼어난 관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좋은 문장은 하나의 좋은 세계다.

카프카의 말처럼,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야, 그 삶이 우리에게 온다. 그것이 삶이라는 마술의 본질이다.




"What the book?! 왓더북?! 당신이 책 씹어먹는 소리", xbooks

서문 :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p.22-23

이만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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