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업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생일 선물은 뭘로 할까.
소극장 뮤지컬 보러 갈까,
가까운 바다 보러 갈까?'

하다가
'가장 좋은 선물은 책읽는 시간' 으로 맘바뀌었다.

산책하고 책읽는 건 날마다 하는 건데도
할 때마다 작심삼일 첫날처럼 새롭다.
더 특별한 무언가를 떠올려보려고 해도
지금은 책읽고 공부할 생각에 가장 설렌다.

내 하루에는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걸어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래서 오늘도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감사한 날.

내일은 글쓰기공작소 "장르와 상상" 학기 첫수업 시작이다.
보온병에 커피 꽉채우고 일찍 가서 앞에 앉아야지 >_<



+



..... 라고 쓰고는.




막상 앉으니

'읽고 싶지 않아!'


눈에 하나도 안들어온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 지금 집에서 혼자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벌떡 일어난다. 집을 나서자. 마지막날까지 안읽히는 책을 반납하러 도립과천도서관에 간다.


중앙공원을 지나면서 하아, 걸음걸음마다 후회가 막심막심이다.

아까 벗님이 "민경 생일 축하~ 잘 지내니? 언제 올꺼냣" 했을 때

"엉 오늘 갈까? 밥먹자 하하 >_<" 할 걸 그랬다고, 뒷북을 둥둥둥 울린다.


해마다 생일 축하받는게 너무 겸연쩍고 쑥스러워서 생일 알람을 다 막았는데, 한군데 빵꾸가 나버렸다. 그 빵꾸난 곳으로 벗님들이 생일을 알고 축하를 보낸 것. 실수로 생일을 알려버린 것을 후회하는게 아니라, 생일축하를 들으면서 또 언제나처럼 쑥스러워해버린 것을 후회한다.


돌아오는 길에 별주막 들러서 요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무감미료 소백산 찹쌀생막걸리 한병 산다. 사장님이 테이크아웃이라고 천원 깎아주신다. 미생물의 보고, 회춘의 명약, 생막걸리! 이거 마시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존재로 변신해야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뽀얗고 촉촉해지겠지.


낭만자매가 전에 "수업들을 때 조금 서둘러서 커피 한잔 들고 우아하게 수업 들어가요!" 하고 선물해준 커피+케이크 쿠폰을 커피랑 티라미스케이크 한조각으로 바꾼다.  마침 유효기간이 오늘까지다. 고때 마침 전화온 낭만자매가 전해준 혼자놀기 팁. "초도 켜고 좋아하는 음악도 틀고, 일기나 쓰고 싶은 글을 써요! 근데 이런건 12월 24일 오후 11:58분이나 12월 31일 오후 11:58분쯤이 제격인데." 얘기 들으면서 허리가 접히도록 웃었다. 이 얼마만에 듣는 아가씨 의식인가.



+



그래서 인증샷 :-D 혼자 지내기 시작해서 처음 맞는 서른 일곱의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윗부분만 따른 맑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뮤지컬 렌트 ost "Seasons of Love"를 들으면서, 일기를 쓴다.





가족이랑 전화하고, 오래 마음 깊이 닿은 벗님들한테 연락이 오고, 스승님한테 엄청 나를 아껴주는 덕담을 듣는 등등 낭만자매가 "이래저래 받은 선물이 많네요!" 할 정도로, 받은 선물이 많은 하루. 고마워요 고마워요- :-D



+



어제부터 관문학당에서는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을 시작했다. 악, 너무 재밌어 너무 재밌어 ㅠㅠ.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쓰인다. 적의 언어와 동지의 언어를 구분하면서 단어에 대한 개념이 싹 다 뒤집어지고 있다.


니체에게 행복은 힘이 고양되고 있는, 생명력이 충만한 느낌이라고 한다. 안락함은 생명력이 궁핍해해지고 고갈되고 있는 상태라고.


그럼 나는, 이제는 안락한 삶을 살 수 없게 됐다. 니체가 사랑하는 몰락하는 자,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 행복할 줄 아는 자로 살아가고 싶어.


몰락에다가 필기해놓은 말.

"사람은 매순간 죽고, 매순간 산다. 몰락을 받아들이면 살아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몰락했다. 폭싹 몰락했다. 내일이 아니고 오늘 몰락해서 다행! 오늘 몰락하고 내일 또 살아나서, 살아가자. 걸어가자. 밥을 먹고,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웃고, 배우고, 잠을 자자. 일흔 일곱, 여든일곱이 되어도 일기를 쓰자. 




+



...... 까지 쓰고 나서.

종이컵만한 물컵에 막걸리 한잔 반 마시고 일곱번 토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딸꾹질 포함.


잠시 내가 일반인인 줄 착각했다.

나 지금 한약먹는 환자인데 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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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줄 한줄 쓰면서 펑펑 울었던 일기를, 다 쓰고나서 한참 후에 다시 읽어도 다음줄 넘어가면서 또 울었던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스윽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낫고 있구나. 나는 확실히 낫고 있다. 이러다가 한순간 또 왔다갔다 할테지만 어쨌든, 어떤 감정의 치우침에서 벗어나고 있다. 쓰면 쓸수록 좋은데, 쓰면서 자꾸 말도 마음도 달라져서다. 아주아주 자세하게 써서 가시가 정확하게 어디에 박혀서 따가운지를 발견하고, 읽으면 따가워서 엉엉 울 수 있으면 절반은 온거다. 어느날 문득 아무렇지도 않은 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는구나.


+



시험은 끝났는데 몸의 피로가 끝나지 않았다.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추워서 기운이 없어서 이불을 꼭 덮고 자는데, 잠들기만 하면 땀을 머리통이랑 목이랑 등짝이랑 가슴팍이 다 젖도록 흘린다. 한의학 수업시간에 마침 나왔는데 이걸 도한이라고 한단다. 구건순조(입술이 건조하고 마르는 것), 유정(여성-냉대하), 소수(몸이 여위는 것), 면색불화핍력(얼굴에 윤기가 없고 생기가 없음) 같은 음허증상들이 나랑 겹친다. 처방은 음을 더해주는 육미지황환.


어쩌다 이렇게 허약해져서, 수업시간에 다루는 모든 증상이 내 얘기같아서 귀를 바짝 세우고 열심히 듣고 있는지, 과하게 긴장하고 듣는 내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



다음주부터는 관문학당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3주동안 강독하고, 세미나에서는 "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글쓰기공작소는 "장르와 상상" 새 학기를 시작하고, 문헌정보학은 팀발표 과제가 있다. 새로 시작하는 공부들이 설렌다! 다만 이 공부에 끌려가지 않고 잘 만나려면 미리 읽을 것도 준비할 것도 많다.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로맹 가리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레이디L" 책도 빌려다 놨는데, 부지런하지 않으면 도로 반납할 판이다. 산책도 꾸준히 해야 몸이 버티는데.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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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정보학 중간고사 기간이다. 월화수 3일동안 시험을 치르니까, 내일이면 끝난다. 단 3일 동안에, 그동안 공들여 가꾼 생활리듬이 싹 무너졌다.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밤낮 없고, 몸에다 커피와 간식을 들이부었고, 눈가며 이마 입술 뺨에 뭔가 와다다닥 돋았다. 생활리듬이 깨지니까 잠을 자도 커피를 마셔도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피곤하다 ㅠ_ㅠ


이건 시험 탓이 아니라 전부 내 탓이다.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공부가 하기 싫어서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 것이다. 딴짓하면서 미루다가 한밤중부터 벼락치기 하고 새벽에 토끼잠 자고일어나 학교가서 시험보고, 집에 와서 낮잠자고, 저녁때 돼서 일어나서 다른 짓하다가 밤샘 벼락치기를 되풀이 한거다. 지금 딴 짓을 해도 시험보는데는 지장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의 행위다. 일단 시작하면 별로 시간 안걸릴 거라는 걸 알아서, 딱 그만큼 움직인 것이다. 생활리듬을 지키고 싶은 마음보다 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커서 내 몸을 혹사시켰다 ㅠ_ㅠ 반성반성.


그래도 다행이다. 내일이면 다 끝난다. 시험 마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목욕탕 가는거다. 뜨거운 물에 목만 내놓고 푹 잠기는 느긋한 회복+충전 시간! 설렌다, 목욕탕 ㅠ_ㅠ 


오늘부터 정상리듬으로 돌아가야지. 일찍 공부 마치고 일찍 잘테다. 중간고사를 보고 나니 어떻게 공부해야할 지 감이 잡힌다. 이걸 과정 다 마칠때까지 다섯번이나 더 반복해야 한다니.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야겠다. 피해봤자 피폐해진다. 피해봤자 고스란히 내 몸이 피해를 입는다.  기말고사는 좀 더 여유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욕탕이 나를 기다린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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