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고 씻는 생활시간 빼고는 읽고, 쓰고, 듣고, 외우고, 걷는다. 여기서 하나 더 바라면 도깨비가 나타나 은표주박에 싹 담아 걷어갈까봐 두려울 정도로, 충분하고 꽉 차있다.

"충만하다!" 하자마자 구멍이 보이기도 한다. 조금 외로운 것 같고, 돈을 벌어야 할 것 같고, 아이들은 잘 지내는지 등등, 보기 시작하면 보이는 것 마다 구멍이겠다.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아예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생각의 시작을 바꾼다. 결핍을 볼 수 있어도 보지 않기로, 이 생활에 다만 감사하고 성실하기로 마음먹는다. 일해서 밥먹고 살 수 있으면 읽고 쓰고 걸으면서 배워나가는 지금처럼 살고 싶다. 그러니 나중에 언제 돌이켜보아도 지금이 최고다. 팽팽한 현재다.

글쓰기 공작소 인간과사회 마지막 수업에서 마르케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텍스트를 분석했다. 엄청난 비극속에서도 품위와 유머를 잃지 않는 대령의 삶의 자세를 만나면서 '공부하고 있어서 너무 좋다-!' 했다. 그 순간이 팽팽한 현재. 그 기억을 불러내어 일기 쓰는 지금이 팽팽한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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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절기는 이제 다 지나고 곡우 하나 남겨놓고 있는데, 요며칠 뒤늦게 봄탄다. 학교가려고 버스타러 가면서 글썽이고, 샘들이랑 점심 도시락 먹으면서 키우던 강아지 죽었다는 얘기에 글썽이고, 내 안부를 물어봤다는 스승님 얘기에 그리워서 글썽이고, 한자 쓰다가 까닭없이 글썽이고, 애들 사진보다가 글썽이고, 밥먹다가 글썽이고, 물마시다가 글썽이고, 자려고 불을 딱 끈 순간 글썽이고, 아주 시도때도 없는 글썽글썽 글썽쟁이가 됐다. 봄타는 글썽임과 동시에 무릎과 팔꿈치를 접기가 어려울 정도의 관절 시큰거림도 왔다.


왜 이럴까. 혹시 마음이 어딘가 불편해서 그렇다면, 불편함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써보니 대충 후딱 써봐도 스무개가 넘어간다. 그러니까 알겠다. 뭐, 당연하다. 초긍정은 하루 하루 상황을 풀어가려는 내 의지인거지, 상황이 초긍정이어서 무지개빛 미래가 자고 일어나면 기다리는 건 아니니까.


+


학교에서 샘 한분이 나더러 "평소에는 조용하게 말 안하고 있는데, 어쩌다 한마디 하면 빵빵 터져요. 너무 웃겨 ㅋㅋ" 했다. 그 말 듣고 둘러선 샘들이 다 같이 "맞아 맞아" 하면서 크게 웃었다 ㅋ 진짠가 싶어 신기하기도 하다. 뭔 말 해도 웃어주는 샘들이 사실은 문수보살님일수도 ㅠㅠ

 

의외의 곳에서 힌트를 얻었다. 넉살력! 평소 에너지를 잘 아꼈다가 한번 확 웃고 넘어가기. 상황을 보는 눈을 바꿔서 상황을 바꾸는, 앉은 자리에서 앉은 자리를 바꾸는, 넉살력을 키워야겠다. 글썽이는 마음을 단박에 뒤집는 넉살력근 트레이닝! +_+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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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아, 내가 사랑해주기로 했다. 평촌역에 있는 큰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때를 밀어서 피부를 매끈매끈하게 하고, 찐양배추가 맛있는 우렁쌈밥도 먹고, 집에서 추출해서 보온병에 담아온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책 읽는 시간을 선물해줬다. 내일까지 반납이라 더 잘 읽혔다 :-D

날마다 날마다 좋은 생각, 좋은 습관, 좋은 몸, 좋은 밥, 좋은 시간을 선물해줄테야.



+


마루야마 겐지 소설집 "달에 울다"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두권을 읽었다.



1.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차례에서 각 장의 소제목만 봐도 "맞아맞아" 하고 감탄이 나온다. 누군가나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고 지금 스스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딜 가나 도피일 뿐이고, 오히려 도피해서 살기에 시골은 더 힘든 곳이라는 말이 마음에 닿았다. 슬로 라이프 시골생활을 꿈꾸는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생각 뒤에 웅크리고 있는 유치함을, 칼들고 쇠고기 부위 나누듯 신랄하게 해체하고 조목조목 짚어준다. 역시 작가다. 지금 여기의 나는 어떤가 흠칫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시골에서 가장 순진하고 소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일지 모릅니다. 대등한 왕래를 바라고, 진심으로 반갑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류를 꿈꾸는 사람은 거기서 당신 혼자일 수 있습니다. 


- 9장, 심심하던 차에 당신이 등장한 것이다, p.114


이 부분에서 확 웃음이 났다. 완전 나다 :-D 그러고보면 나는 운이 좋았던 거다. 꿈꾸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고, 거기서 같은 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도시에서 와서도 여전히 순진하고 소박한 것 같기도 하고 ㅠ_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오랜 시골 생활이 저의 몸과 마음을 단련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도시에서 그 세얼을 보냈다고 상상하면 절로 오싹해집니다. 아마도 천박하고 경솔한 이미지 소설밖에 쓸 수 없는, 일회용 작가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빛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 13장, 불편함이 제정신 들게 한다, p.195



2. [달에 울다] - 조롱을 높이 매달고


회사에서는 실직하고 집에서는 두아들과 아내에게 버림받고 병원에서는 정신질환 판정을 받은 40대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집을 내쫓겨 나와서, 병들고 늙은 개를 차에 태우고 어렸을 때 가족이 함께 살다가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떠난 지금은 폐허가 된 M도시로 무작정 돌아간다. 바닥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잃고 잃고 잃는다. 꺼내보기 고통스러워서 외면하고 있던 가난한 과거와 바닥인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영혼을 정화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내는 이야기.


다 읽고 탕에 들어와서 앉았는데,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거울속 자기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남자가 생각나서 계속 눈물이 났다. 탕이 뜨거운지 손이 뜨거운지, "아뜨거 아뜨거 ㅠㅠ" 하면서 눈을 닦았다.



나는 이미 죽었지만 무언가 잘못되어 다시 살아났다. 바다를 희미하게 감돌던 석양빛이 사라지고 대신 수많은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달이 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어떤 소리도 방해하지 않는다. 나는 혼잣말도 하지 않고, 만들다 실패한 동상처럼 얌전했다. 빨간 하이힐의 여자가 맞은편 집 부근을 배회하는 일도 없었고, 말탄 무사들이 거리를 내달리는 일도 없었다. -p.256


나는 늘 세우던 곳에 차를 세우고, 왼손에 세면기를 오른손에는 조롱을 들고 피리새의 지저귐을 휘파람으로 흉내 내면서 원주 사이를 걸었다.

나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순간이 행복한 듯도 했다. 누구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나는 나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겠다. 단순한 이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다면 좋았을 걸." 또하나의 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말했다. "이제부턴 그래야겠어." -p.261


옮기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생략. 풍경이 새로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랑, 나와 또하나의 내가 화해하는 부분만 옮겨둔다. 바닥의 바닥을 쳐도, 다시 올라와서 빛나는 별과 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친구를 멀리하고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고 자신을 고립한 상태로 둘 것. 예술이란 영혼과 접신하는 일이므로 행복이나 안정과 가까우면 그만큼 예술에서 멀어진다. 진실로 문학을 목표로 한다면 고독을 향해 고독을 누르고 고독을 초월하라. 자신 말고 다른 데서 힘을 구하려 하지 마라. 불안, 분노, 고독감, 슬픔을 돌진해나가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문학의 금광이 펼쳐지고, 아무도 밟지 않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자폐가 아니고 앞을 향한 '개인', 앞을 향한 '활'이어야 한다.


...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안정이 아니고 불안정, 질서가 아니고 혼란, 집단이 아니고 개인, 협조가 아니고 고행, 타협이 아니고 반항, 즉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 입장에 서봐야만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이고, 갈등이 생기고, 불꽃이 튄다.


- 에세이 "미래의 글 쓰는 이에게" 중에서, [달에 울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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