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언니 : 민경! 요새 무슨 재미로 살아?

 

나 : 만교샘 글쓰기 공작소 강의 듣는 재미요! 사쁘나 샘이 추천해준 소설 읽는 재미도 있고요. 글쓰기 공작소 신입이 읽을 책 목록에 있는 책 하나씩 하나씩 읽어가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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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책 추천목록에는 모파상 <비계 덩어리>랑 체호프 <귀여운 여인>이 있어서, 모파상, 체호프,오 헨리 단편소설이 각각 다섯 작품씩 들어있는 "세계 3대 단편작가 걸작선"을 괴산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책 제목에서도 느낌이 살짝 났는데, 펴보니 역시 수험생을 위한 책이다;;; 그런데 의외로 괜찮다. 작가는 어떻게 자라나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삶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었는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글을 썼는지 작가에 관한 도움글이 있다. 그리고 편마다 이 작품이 어떤 부분을 자세하게 그려냈기에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지, 이 작품이 한번 비틀어서 건네는 더 깊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짤막하고 예리한 해설도 있어서 더 재밌게 읽었다. 수험생을 위한 책이라고 도덕 교훈만 얘기하는 것도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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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귀여운 여인>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녀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자신의 온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틀어쥐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런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사랑만이 식어가는 그녀의 피를 다시 한 번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읽은 후기를 대략 검색해보니, 올렌카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그 대상에게 완전히 몰입해서 자기 주관이 없어지고 상대와 똑같아져 버리는 것을 꼬집는 말이 많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남자든 여자든 올렌카와 얘기하는 사람은 "정말 귀여운 아가씨로군!" 한다. 올렌카는 자기 연민에 차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해서 상냥하게 잘 들어주고 잘 기억하고 잘 반응한다. 사랑하고 있는 내내 평범한 사람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사랑하는 이의 세계를 더 깊이 받아들이면서 자기 자신도 빛이 난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한결같이 사랑을 퍼낸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이 관계가 단절되어도, 나름의 기간을 가지고 충분히 애도하고, 다시 다가온 사랑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길어올려 빛을 내면서 살아간다.

 

공부를 잘 하려면 이전에 배운 것을 다 잊고 새로 배우는 것으로 온 몸을 채워야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들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사랑을 하면 이전에 했던 사랑을 다 잊고 눈 앞에 있는 사랑으로 온 몸을 채울 수 밖에 없지 않나.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람, 그 앞에 반응하는 새로운 내가 우주에서 오직 한번뿐인 둘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랑은 처음일 수밖에 없고, 첫 사랑앞에 나는 이제까지 없던 새롭고 낯선 나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낯선 나를 발견하고 새로 만들어가는 기쁨.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결과. 사랑하는 대상과 합치하는 경험의 기쁨. 사랑하고 있을 때에 넘쳐나는 생기를 올렌카는 알고 있다. 그래서 교감하는 대상이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은 내가 없어지는 것과 맞먹을 정도이기도 하겠다.

 

상실감을 잊고 또 다시 또 다시 가까이에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이 처음인 것처럼 모든 걸 쏟아붓고 의지하고 대상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지난 사랑에서 배우고 익힌 것이 없고 되돌이표 같아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올렌카에게는 그 순간부터 새롭게 삶이 뭐든지 나오는 마술보자기가 펼쳐지는 것처럼 쫙 펼쳐졌겠다.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계를 살았겠다.

 

나는 다만 시작하는 용기, 새로운 관계, 타자가 되는 경험이 자신의 성장을 돕는 것,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빛나게 하는 사랑, 일상의 소소한 행복으로 빛나는 나날을 응원하고 싶다. 잘 사랑하면 좋겠다. 그래서 또 다시 사랑하는 대상을 얻어도 내가 없어지지 말고, 잃어도 내가 없어지지 말고, 사랑하면서 내 안에 새로 생겨난 빛나는 것을 소중히 가꿔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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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이렇게 한 달만 지나면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추억은 희미해져 다른 여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득한 미소를 지은 채 이따금 꿈속에서나 나타날 거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달 이상이 지나고 한겨울이 왔는데도,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이별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 추억은 더욱 강렬해져 갔다. 고요한 저녁, 아이들의 공부하는 소리가 서재에까지 들려올 때에도,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노래나 오르간 소리가 들려올 때에도, 페치카 속에서 바람 소리가 윙윙 울릴 때에도, 그녀와의 모든 추억이 떠올랐다.  ... 그는 한동안 방안을 거닐면서 그때를 떠올리고 미소 지어 보았으나, 회상은 점점 공상으로 변하여 마침내 그 공상 속에서 과거와 미래와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림자처럼 어디를 가나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  

 

...

 

그 많고 많은 날 밤에 미친 듯이 벌어지곤 하는 트럼프 놀이, 과식과 과음, 지루한 대화..., 이러한 쓸모없는 일에 가장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고 남은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 실없는 농담뿐이다. 마치 정신병원이나 감옥에라도 갇힌 것처럼 도망칠 수도 달아날 수도 없다.

그날 밤, 그는 공연히 화가 나서 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틑날은 온종일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밤마다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밤을 새우곤 했다. 이젠 아이들도 귀찮았고, 은행일도 싫증이 났다.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

 

"내가 모스크바로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나는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고, 그것은 현재도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절대로 행복하진 못할 거예요."

 

...

 

그는 두 사람의 사랑이 그리 빨리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애착은 더욱 강해지고 열렬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들의 관계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런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

 

그 숱한 여자 가운데 그와 관계를 가져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다른건 몰라도 사랑만은 없었다.

 

...

 

"그만큼 울었으면 됐어... 이제 이야기나 하며, 뭐든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머리를 감싸고 자문했다.

"어떻게 하면....?"

그러자 조금만 더 있으면 해결 방법이 생길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끝은 멀고도 멀어, 이제야 막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된 것 뿐이라는 것을 그들 두 연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랑이 새 길을 만들어 낸다. 없던 틈을 만들고, 현실로 한발 더 나간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백발이 보이기 시작한 이제라도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까지 없던 것이 생겨난다. 자꾸 생겨난다.

 

 

고만고만한 물웅덩이가 있는 뚝방길.

 

 

오늘 아침에 한결이랑 온유랑 어린이집 가는데, 여느 때처럼 큰길로 가려는데, 이런다.

 

"농장 옆에 흙 있는 길 있잖아, 그 길로 갈래."

 

뒤에서 따라가면서 보니까 만만한 웅덩이는 휙 뛰어넘고, 큰 웅덩이는 신발이 젖지 않도록 옆으로 돌아간다. 기합을 "허잇! 허잇!" 넣는다. 매번 앞에 나타나는 웅덩이마다 자기의 능력을 시험한다. 평평해서 편한 길 보다는 좀 돌아가고 늦더라도 아슬아슬하게 모험을 하면서 즐겁고 신나게 가는 길이 아이들은 더 좋은 것이었다.

 

솔멩이골에서의 내 삶도, 이런 웅덩이 길일까. 한번 한번 아무 것도 아닌 자잘한 시험의 연속. 나도 아이들처럼 일상에서 아슬아슬한 신나는 모험을 할 수 있을까?

 

 

 

노을빛 받은 아카시아, 싸리꽃, 갈대, 강아지풀.

노을빛을 보니 밤이 오기 전에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지갑이랑 핸펀만 들고 입은 옷 신발 그대로 조금이라도 더 가능한한 빨리 휙.

 

어서 맹자 강의 들으러가는 다음주 화요일이 되어라, 되어라. 어서 글쓰기공작소 강의 들으러가는 다다음주 토요일이 되어라, 되어라. 이 곳이 돌아와야 하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고 싶은 곳이 되어라,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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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니면 더 헤메고 싶고, 여기면 더 이상 헤메고 싶지 않다. 내 자리가 여기면 좋겠고, 내 자리가 여기가 아니면 좋겠다. 여기에 있으면 여기가 내 자리인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여기 아닌 곳에 있으면 여기가 마치 내 자리인 것 같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사이에 서서, 내일은 모르고 지금만 살고 있는 사람처럼 하루씩 하루씩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름 선전하고 있고만 :-D

 

+

 

언제쯤 닻을 내린 기분이 들까. 안심할 수 있을까. 안심하고 숨을 내쉴 수 있을까. 닻을 내린 안심한 기분으로 계속 살 수는 있는 걸까? 닻을 내린 기분은 알고 있다. 사랑처럼. 작심삼일의 첫날처럼. 그 순간 순간은 진짜다.

 

어쩌면 방황이 끝나기를 원하는 건, 찰나일 수밖에 없는 진실을, 찰나이기 때문에 진실일 수 있는 것을, 영원히 붙들어 두기를 바라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해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달라지려고 애쓰는 지금 이대로가 제대로 가는 것일지도. 제대로 가고 있는거면 좋겠다. 잘 지내고 있는 거면 좋겠다.

 

가도가도 끝없는 지평선처럼 끝나지 않는 방황을 끌어안고, 오늘도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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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상경하면서 들고나온 책은 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사쁘나가 추천해 준 소설목록 중에 하나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서 용대가 명화가 녹음한 테이프를 명화가 세상을 뜨고 나서 들어보는 장면을 읽은 곳이 하필, 강학원 공부방. 간식 당번이라 준비하려고 조금 일찍 와서 기다리면서다. 여기서 울면 안되는데. 여기서 울면 안돼. 소리없이 숨은 죽였는데 눈물이 가방에 떨어져서 투둑투둑 소리가 났다. 곧 부어오른 두꺼비 눈이 됐다.

강의 마치고 뒷정리하고 언덕을 혼자 내려오는 길은, 비가 그쳤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고 서늘하고 조용하다. 울먹울먹하면서 충무로역까지 걸어내려온다. 소설속 사람들이 겪는 고립감과 막막함이, 안보려고 밀어놓지 않으면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려는 내 생활의 어떤 부분을 아프게도 정확히 짚어서 불러낸다. 잠깐의 행복. 동경. 빠져나가는 빛. 아직도 어디인지 모르겠는 내 자리. 그래도 용케 씩씩하다. 씩씩할테야.

지금 나래를 만나러 간다. 나래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래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었으면 앞이 안보이도록 울면서 걸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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