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삶이다."
- 사르트르와 글쓰기 이야기를 새벽까지 나누고 돌아와서 보부아르가 쓴 일기.


같은 것들이 같은 회로 안에서​ 순환하는데서 어떻게 서사가 만들어지겠는가. 서사를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 듀오가 만든 동일성의 순환 어느 틈바구니를 열고 다른 하나가 밀치고 들어서야 한다.


사랑하면서 그들처럼 사랑 자체를 그토록 많은 언어로 풀어낸 연인이 또 있었던가. 소설, 희곡, 일기, 자서전, 편지 등 ....... 글쓰기가 곧 사랑이었던 그들에게 서사는 사랑의 진리를 대변한다.


사랑이 살아남으려면 모순을 품어야 한다. 트리오 사랑은 나, 너, 그리고 타자, 출발선에서부터 모순을 품은 사랑이다. ... 그러나 이런 불행한 상황이 모두를 펄떡거리는 생명체로 흔들어 깨운다. 반복되는 일상성의 매너리즘 속에서 퇴색해버린 사랑이라는 어휘의 의미도 새롭게 살아나고, 새로운 애정 상황에 발을 담가야 하는 몸도 탄력의 리듬을 회복한다.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두가 모순없는 사랑의 말로다. 배타적으로 둘이서만 나누는 사랑은 단조로움과 권태로움 속에 몰락하게 돼 있다. ... 사르트르•보부아르는 모순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의 진리를 꿰고 싶었다. 그들은 끊임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항상 사랑의 첫 얼굴을 찾으려 했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삶과 글쓰기의 이 숙명적 결속 관계를 "참여"라는 어휘로 요약한다. "... 문학은 당신을 싸움터로 끌어들인다. 글쓰기는 자유를 희구하는 한 방식이다. 따라서 일단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 당신은 좋건 싫건 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참여는 이미 그어진 선 위에 같은 선을 한 번 더 긋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선 하나를 붙여넣는 것이다. 차이를 만들어내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 자유롭고 능동적 선택때문에 참여는 투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 서로 사랑한다. 방해자도 없다. 당연히 골치 아픈 트리오의 삼각관계 같은 것도 없다. 세상의 관습대로 결혼한다. 일을 하고 애를 낳아 양육한다. 그러면서 늙어가다 죽는다. 이것은 정해진 트랙이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참여로서의 글쓰기란 이를테면 이런 식의 정해진 트랙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자유를 요구하고 또 투쟁의 양식으로 전개되는가. 참여의 이유, 즉 글 쓰는 이유가 이 관습적 트랙에 주체적으로 맞서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듀오만로 무슨 얘깃거리를 만들겠는가. 서사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사르트르•보부아르 커플은 글을 쓸 수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글 쓰는 인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글 쓰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들은 사랑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 사랑이 자신의 진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트리오의 드물망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순전한 자신의 사유로 전생애에 걸쳐 지향하고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거듭한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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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기다리던 삶이다, 라고 일기 쓸 수 있는 만남이라니. 그런 마주침이 귀하다. 그들도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가 아니구나. 모순을 안고 타자를 끌어들이고 관계에서 살아남기를 거듭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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