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길 찾기]근사록

 

인(仁)이란 만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로 의·예·지·신이 모두 인이다. 이런 이치를 인식한 다음은 성(誠)·경(敬)으로 보존하면 되니 단속하거나 애써 모색할 필요는 없다.

의서(醫書)에 수족의 마비를 일컬어 불인(不仁)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인(仁)이라는 이름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했다. 인자(仁者)는 천지만물을 일체(一體)로 여기니 자기 몸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천지만물을) 자기 몸으로 인식할 수 있으면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일 (천지만물을) 자신 안에 두지 않으면 자연히 (천지만물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 되어, 마치 수족이 마비되어(不仁) 기(氣)가 통하지 못하여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된 경우와 같다. 따라서 박시제중(博施濟衆), 즉 널리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역할이다. (정명도 ‘근사록’ 중)

 

 

 

인(仁)은 소통(疏通)이고 흐름이다. 불통(不通) 즉 마비는 인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소통은 상호간의 최대공약수를 찾는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소통은 이질적인 대상들도 얼마든지 서로에게 장애가 되지 않고 흐를 수 있는 관계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문에 ‘통’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이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소통의 진정한 제1전제는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와 같지 않은 상대에 대해서도 귀를 닫지 않는 것이다.

 

‘인한 이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仁’이란 개념의 이미지가, 산이 보여주는 무차별성과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서는 크거나 작거나 푸르거나 붉거나 용맹하거나 온순하거나 등등의 개체적 특이성들이 억압되지도 차별되지도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은 결국 누구의 말을 들어준다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말을 관철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나와 타자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 타자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의견 일치는 소통의 목적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소통은 이질적인 두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문성환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000&artid=20080617175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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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음이 불편한 분과 술자리에서 눈을 대충 마주치는 바람에, 대충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무례한 언어와 조절 안되는 화를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에 몇 번 놀랐고, 어정쩡하게 풀긴 했지만 앙금이 남아,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에서 만나서 "오셨냐"고 인사치례 하는 것도 간신히 간신히 하는 정도다.

 

마주치기 싫어서 공동체 활동에 참여도와 애정이 비맞은 오디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공동체를 탈퇴할까'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소중한 관계가 많더라. 팔짱끼고 버틸 오기가 생겼다.

 

마주치기 전에 살그머니 피하고 싶다. 크게 불편한 것도 없는데 이대로 불통의 상태로 계속 있고 싶다. 불편한 관계 하나 정도는 없는 셈치고 묻어두고 가고 싶다.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려나.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소통이라면, 한번쯤, 두번은 못하고 딱 한번쯤은, 용기를 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귀를 닫지 않고, 흐르게. 뻔한 결말 대신 반전을. 할 수 있을까 oTL 끙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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