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궂이한다. 평소보다 1/5 빠르기로 움직인다. 이럴 때 안늘어지고 같은 시간이면 가장 탄력있게 지내는 선택은 뭐지.

오늘은 Stan Whitmire 피아노 독주를 몽땅 틀어놓고 머릿속에 있는 손가락으로 음을 따라짚으면서, 꾸물꾸물 집청소한다. 듣는 것과 치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지만, 뭐 괜찮다. 시냅스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집도 조금씩 깨끗해지는 실용적인 선택을 한거다. 날이 궂으면 단지 몸만 느릴 뿐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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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 대해 : 작품해설

 

 

나는 단편소설 쓰기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에 설사 내가 원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만둘 수가 없다. 그리고 그만두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좋은 단편이 보여주는 재빠른 도약을, 종종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흥분을, 최상급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감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단편소설은 앉은자리에서 다 쓰고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시처럼!)

 

V.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그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에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깊게 새겨질 것이다. 헤밍웨이가 너무나도 멋지게 해냈듯이, 독자의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원히. 작가는 희망한다. 영원히.
만약 우리가, 작가와 독자 모두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단편소설의 마지막 한두 줄을 마치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방금 우리가 쓴 또는 읽은 글에 대해 생각하리라.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 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리라. 그리고 체호프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체호프의 단편 [제 6병동]에 나오는 문구이다)”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일체  : 단편모음집에 쓴 서문

 

 

독자들은 편집자가 단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좋은 궁금증이다. 내가 무척 끌리는 지점은 종종 단편소설이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때이다. 이것도 주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단편소설은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은 부분을 말이다. 단편소설 작가들만 제외하고.

 

작가는 글을 쓰고 또 쓰며, 계속해 쓴다. 어떤 경우에는 글쓰기를 관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인데도 오랫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쓴다. 글쓰기를 관두거나 또는 아주 많이 또는 진지하게 쓰지 않는 데는 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급박한 이유들도 많이 있다. (글쓰기란 늘 모두가 얽힌 골칫거리이고, 골칫거리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주 가끔 번개가 내려치고, 종종 그 번개는 작가 인생의 초기에 내려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글을 쓰기 시작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 내려치기도 한다. 그리고 물론 대부분의 작가에게는 평생 번개가 내려치지 않는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번개는 당신이 정말 싫어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내려칠 수도 있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원래 세상이란 게 그렇다.) 그 대상은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고, 당신 친구이거나 친구였던 사람일 수도 있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당신도 갔던 파티에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 또는 누이를 데리고 도망쳐버린 자일 수도 있다. 창작 수업 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아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말 안 하던 젊은 작가일 수도 있다. 제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편다 할지라도 누군가가 꼽는 기대주 열명의 목록에 이름이 들어갈 수 없을 듯한 작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일은 일어난다. 다크호스, 번개,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때가 훨씬 더 재밌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글쓰기를 자기 목숨만큼이나, 호흡만큼이나, 음식만큼이나, 쉴 곳 만큼이나, 사랑만큼이나, 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글쓰기에 대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급히 책을 써야 했다거나, 혹은 편집자가 성화를 부렸다거나 부인과 갈라서는 중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작품이 아주 좋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있다. “시간을 더 들였다면 훨씬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거야.” 소설가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더 잘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쓴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과 그 노동의 증거가 아닌가. 나는 그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 작가는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쉽고 또한 아마도 더 정직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능력과 재능을 다해 글을 쓰고, 일단 쓴 다음에는 합리화를 하거나 핑계를 대지 마라. 어떤 불평도, 변명도 하지 마라.

 

언젠가 나는 결과적으로 꽤 좋은 단편이 된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그 글을 시작할 때는 단지 첫 문장만 있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그 문장이 떠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청소기를 쓰고 있었다.([내 입장이 돼보시오]의 첫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나느 그 서두에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 이야기를 쓸 시간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종일, 아니면 열두 시간이나 열다섯 시간이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 나는 시간을 냈고, 아침에 앉아 첫 문장을 썼다. 그러자 다음 문장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시를 쓸 때처럼 그 단편을 썼다. 한 줄, 다음 한 줄, 그다음 한 줄. 곧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내 이야기임을, 내가 계속 쓰고 싶어했던 이야기임을 알았다.

 

V.S.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얼핏 본’이라는 부분에 주목하라.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만약 – 또 한번 말하지만 – 우리가 운이 좋다면, 더 넓고 깊은 결과와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단편소설 작가의 임무는 온 능력을 그 얼핏 본 것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의 지혜와 문학적 기술(재능)이 무르익고,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지고,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와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감지할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은 명확한 언어를 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언어는 독자들을 위해 이야기를 밝혀줄 세세한 부분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세세한 부분들이 확고하고 의미를 전달하려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써야한다. 단어들은 너무나도 명확하기에 어쩌면 평범하게 보이기까지 하겠지만, 그럼에도 전해야 할 뜻은 여전히 전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쓴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음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고쳐쓰기에 대해

  

 

나는 내 단편 소설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처음부터 제대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글을 다 쓴 뒤 이리저리 고치고, 더 고치고, 여기를 바꾸고, 저기를 바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 있어 처음에 글을 쓰는 건 그 이야기를 가지고 놀기 위해 견뎌야 할 시련처럼 보일 뿐이다. 내게 있어 고쳐쓰기는 하기 싫은 시시한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충동적이기보다는 계획적이고 신중한 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뭔가에 대한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연관지으려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다 쓴 글을 개정하는 작업이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 확실하다. 어쩌면 내가 개정 작업을 하는 건 그 과정을 통해 점차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심장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애를 써야만 한다. 글이란 고정된 위치라기보다는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눈은 삼립호빵에 욱신욱신, 머리는 띠잉-. 이럴 때 읽을 소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정말 좋다. 한꺼번에 다 안읽고 일부러 하루에 얼만큼씩 얼만큼씩 나눈다. 날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즐거우려고, 일상으로 같이 가려고, 참고 아낀다.

 

[글쓰기 공작소 신입문장반 <만남,대화,사랑> 2부 - 2강 텍스트]

 

최윤 <하나코는 없다>

한강 <몽고반점>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그외 더 읽거나 보면 좋은 작품. 수업 때 직접 다루진 않지만 언급될 작품.

김동리의 <황토기>

윤대녕 <천지간>

영화 <나라야마부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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