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중에서, 내가 결혼했을 경우 유지할 수 있는 일상은 얼마나 될까? 아니, 그에 앞서 내가 결혼해야 할 필요성은 내 일상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내가 일상을 스스로 꾸리는 느낌이 중요하고, 나 스스로에 맞춰진 재무 계획과 생활 수칙을 꾸리며 지키고 있다. 매일의 유동적인 삶이 누군가에겐 불안이겠지만 내겐 원할 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는 기본 세팅이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이 안정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리스크 요소이기도 하다. 원할 때 사랑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타인의 동의나 합의를 구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이사를 하고, 스스로가 자연스러운 시간에 식사를 하고 움직이는 삶.

비혼이 결혼을 이긴 것이 아니다. 비혼과 결혼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혼이 낫다고 생각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 결혼이 들어올 틈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살아갈 뿐이다.

- p.23, <안녕하세요 비혼입니다>

 

 

삶에서 나를 성장시킨 경험은 비판이 아니라 받아들여짐에서 왔다.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서로만이 서로가 던지는 말의 뒤편을 믿고 앞으로 갈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삶의 형태와 결정이 달라도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엔 의심이 들지 않는 사람, 나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알고 그 중심에 언제나 나를 놓아주는 사람. 근 십 년간 나를 견뎌주고 내 삶의 한 편을 진득이 차지해준 일곱 명의 친구들에게 지면을 빌려 사랑을 보낸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모르는 사이 서로를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린 사랑이 멋대로 만들어내는 위태로운 권력보다는 서로의 실수와 부침 속에서도 단단한 별장이 되어주는 것으로 이 마음을 이어가자고도 부탁하고 싶다.

- p.142, <우리는 서로의 몸을 관찰하며 컸다>

 

 

나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가고 알아낸 것을 활용해 다음에 내가 나에게 실수하거나 나를 방치하지 않도록 일일이 챙기는 일은, 타인과 하는 사랑과 닮아 있다.

  •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기
  • 너무 무리할 때 알람을 울려주기
  • 필요한 때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데려가기
  • 제삼자의 평가가 어찌 되었든 수고한 것을 알아주고 칭찬하기
  • 아무리 바빠도 밥 챙겨 먹이기

나를 사랑하는 일은 열심히 시간과 공을 들여 나를 세세하게 알아가는 일이다. 상처받기 쉬운 나에게 상처받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상처를 줄 거리들을 열심히 가지치고 안전한 길을 끊임없이 터주면서. 

- p.148, <나 데리고 살기 매뉴얼>

 

 

삼백 여명이 들어찬 큰 공연장에서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김이나 님과 당시 진행자였던 요조 님만 밝게 보이던 순간, 나는 갑자기 안도감이 들어서 울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대면할 때의 긴장감 없이 마냥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안락하고 행복했다. 친분 따위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내 별을 갖는다는 환희의 감각. ...... 콘서트가 없는 아티스트의 덕질을 한다는 것은 일상의 이벤트가 적어서 심심한 일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내 삶을 잘 유지하면서 동행할 수 있는 좋은 밀도의 기쁨을 끼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쌓여간 그의 삶이 어느 지점에서 내 일상과 만나 내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분명 동시대를 살면서 동시에 달력을 넘기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교류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평행우주 같은 어딘가에서 그가 매일 잘 일어나고 곤히 잠들길 빈다.

- p.186, p.193, <남편은 없고요 최애는 있습니다>

 

 

"속상한데 만나서 같이 글이나 쓰시죠!"

써야 할 단행본을 둔 비혼 여성 작가 넷이서, 그렇게 해방촌에서 만났다. ...... 문득, 그냥 이렇게 살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서로의 불안과, 부담과, 일과, 감정을 알아봐주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서 자기 모니터에 집중한 채 있어도 그게 훌륭한 일요일이 되는 날들을 이어 붙여가면서. 애인이 둘이 있어도, 아예 없어도, 가족과 싸웠어도, 오늘은 훈훈하게 넘어갔어도, 어쨌거나 써야 할 글이 있는 부담스러운 일상을 함께 건너가면서. 가끔은 내 공간에 와서 내가 이제 당연시해버린 내 풍경이 얼마나 특별하고 좋은지 일깨워주기도 하고, 가끔은 남의 공간에 가서 거기 있는 소품 같은 행복들을 호캉스처럼 만끽해보기도 하고. 비혼의 여성 작가들, 덩어리로 보이는 네 사람이 얼마나 다르고 고유한지 지켜보고 나를 이루는 모남에도 조금은 안심하면서, 거기서 또 용기를 얻고.

- p. 212, <함께 건너는 일요일>

 

 

캥 언니는 항상 깔깔 웃는 사람이었다. 리액션도 크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작은 일에도 잘 즐거워하는 선배였다. 연년생 막내로 살아서 그런가 한 살 차이 여자 선배가 보풀이 많이 피어난 애착 파자마마냥 편하고 좋았다. 술을 좋아하는 캥 언니는 내가 아직 본인 주량도 모르면서 자존심만 세가지고 항상 끝까지 마시는 것을 일종의 의리로 받아들였고, 나는 캥 언니가 술 마실 때마다 더 크게 웃고 더 큰 흑역사를 만들어가면서도 언제나 나 자신과 남의 술버릇에 관대하다는 점을 좋아했다. 애착 파자마 같은 선배는 점점 보풀을 양산하면서 내 몸에 착 붙었다.

... 

나는 캥 언니가 정말 좋은 뗏목 메이트라고 생각한다. 내가 뗏목에 있다는 불안감을 느낄 때쯤, 일단 누워서 하늘을 보게 만드는 사람. 어차피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눈앞에 있는 가장 즐거운 풍경을 펼쳐놓는 사람. 웃다가 까먹고, 웃다가 까먹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자연 소멸하는 고민거리가 있기도 하고, 웃기는 걸 추구하면서 일단 되는 거부터 하고 살다 보면 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 타고난 예능 제작진. 덕분에 표류하던 내가 언니와 같은 길 위 출발지에서 이렇게나 멀리, 내 나름의 속도와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

- p. 220, p. 227, <웃다 보니 함께 뗏목 위 이만큼 멀리>

 

 

혼자 살면서도 언제나 커다란 냄비에 국을 끓이는 언니는 새로운 국을 끓이면 찍어서 SNS에 올린다. 먹으러 올 친구는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코멘트와 함께. 언니네 집에서 언니가 지은 밥을 자주 먹는 친구들은 신메뉴를 맛보고 싶은 기대를 담아 댓글을 단다.

... 언니는 자고로 국이란 크게 한 솥 끓여야 맛있지, 라면 냄비만큼 1인분 끓여서는 맛이 안 산다고 하지만, 내게 그 큰 손은 사람 좋아하는 언니가 언제든 따뜻한 밥 한 끼는 먹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마음처럼 느껴진다. 심심하다고 해도,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아니면 그냥 '뭐 해?' 물어도 언니는 구구절절 다른 걸 묻지 않고 "우리집에 밥 먹으러 와. **국 해놨어." 한다. 밥을 먹고, 부른 배를 쓰다듬고, 설거지를 하고 배 터지겠다면서 같이 누워 있으면 그때부터 시시콜콜 사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나의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언니는 잃은 사람들을 떠올릴 때 '밥이라도 한 끼 챙겨 먹일걸.'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른 건 몰라도 밥 한 끼는 챙겨 먹이려고, 커다란 냄비 가득 관심을 끓여두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상황이 달라도 밥 먹자고 불러두면 식사든 불평이든 상담이든 하게 되니까. '그래도 내가 밥은 챙겨 먹였다'는 소소한 위안이 생길지도 모르고. 나는 언니가 미리 끓여둔 마음을 박자에 맞춰 야무지게 싹싹 비우고 거대한 국 냄비를 보면서 저기 담긴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

주변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주변에는 글로 마주친 인연도 포함되니까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죽고 싶은 와중에 이런 책을 만나 이런 문장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것대로 삶이 해둔 알 수 없는 계획일 거라고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일단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바닥을 친 내 삶은 반등중인 거라고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밥들과 빛나는 밤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걸 빠른 시일 내에 만끽하는 확실한 방법은 일단 하루 더, 또 하루 사는 것이라고.

- p.245, p.247, <네가 죽는다면>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적절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는 사회의 윽박을 이겨내고 뭐라도 말해온 모난 사람들이 전해준 용기 덕분인데.

나는 적절하지 않다. 적절하려고 평생 노력하며 살겠지만, 그 적절하려는 노력의 방향과 강도도 적절할 방법이 없으므로 나는 적절한 사람이 아닌 채 평생 살아가게 되겠지. 하지만 말해도 된다. 내 삶을 이야기할 자격은 내가 나에게 주었다면 그만이니까.

- p.266, <당신이 뭔데 비혼 얘길 하는 거예요?>

 

 

"더불어 혼자 살아요!"

-p.272

올 초에 한결이랑 온유가 왔을 때

 

한결 :

엄마, 나 어제 늦게 자서 너무 피곤해.

새벽 세시에 잤어.

그리고 아침 여덟시에 일어나서 차 타고 온 거야.

주말인데 학교 갈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힘들게 온 거야.

 

나 :

헉, 엄청 피곤하겠다.

그렇게 피곤한데도 엄마를 만나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

오늘 일찍 자자. 내일 아침까지 푹 늦잠 자자.

근데 뭐하다가 세시에 잤어?

 

한결 :

시 쓰다가.

 

나 :

우와 @_@

 

 

다들 잠들었을 때 몰래 일어나서

시를 쓰다가 다시 잔다고 한다.

종종 그런다고.

 

며칠 전에 대충 본 유튜브 영상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행복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고통을 불사하는 것이라고,

비윤리의 범주라고 했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한결이 생각이 났다.

 

제 때 자고 제 때 일어나야 마땅하고 옳은

성장기 청소년의 생활 윤리를 벗어나

한밤중에 몰래 시를 쓰는 한결.

잠도 미루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한결.

 

비윤리적이고 불량한 엄마는 

한결이가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좋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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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26(토)

바로 다음주부터 중학교에 가야하는데 책가방도 공책도 필기구도 없어서 오늘 나가서 다 사가지고 오자고 했더니, 한결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 안 나가고 집에서 그냥 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가방은 엄마 마음대로 골라도 돼. 핑크색도 괜찮아. 시크릿 주주나 콩순이나 공룡이 그려져 있어도 다 괜찮아. 나는 집에 있을게. 잘 다녀와 엄마."

해서 까르르 웃었다 ㅋㅋㅋㅋㅋ 어림없는 소릴 ㅋㅋㅋㅋ

"반짝이가 막 달린 것도 괜찮고 무지개색인 것도 괜찮아.
나 그럼 이제 집에서 놀게? 헤헤헤"

너스레쟁이 같으니 :-D

+

쇼핑몰 가서 눈으로 보면서 고르는데
다 칙칙하고 등산가방 같아서 싫다고 한다.
그치. 청소년 책가방이 초등 모양 같지 않지.

보다가 산호색 가방을 가리키면서 "이거 좋아" 했는데
주 책가방으로 쓰기엔 너무 얇고 주머니도 몇개 없었다.
안타깝지만 보조가방스러워서 패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색도 모양도 비슷비슷하고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중고등학생한테 그렇게 가만히 학교생활하라는 것처럼.

결국 때가 탈 것을 각오하고 그나마 밝은 색으로
베이지색 가방을 골랐다.
한결이의 다채로운 색취향이 묻히지 않고 자라나도록
잘 물어보고 지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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