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집안일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밀린 집안일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5분이면 할 수 있는 설거지를 다섯번 밀리면 25분이 걸리는 게 아니라 한시간이 걸린다. 100%의 확률로 그릇에 음식물이 말라붙고, 개수대까지 더러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0분이면 할 수 있는 청소를 한동안 방치하면 날을 잡아 온종일 쓸고 닦고 환기를 시킨다고 해도 좀처럼 원래 모습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놀라운 건, 정기적으로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 어째서? 매일 샤워를 하며 비눗물과 함께 저절로 씻기는 거 아니었어? 그때 나는 찌든 때, 묵은 때 같은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건 무관심과 방치가 만든 시간의 더께다. 일단 찌들고 묵게 두면, 그때는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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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특별한 날에만 하는 이벤트 같은 게 아니다. 작은 관심과 행동들의 반복이고 연속이다. 흔히 말하는 쉰내는 일상의 어느 부분이 방치되고 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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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망가져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해서 일상이 망가지는 것이다.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건 작지만 결코 작지만은 않은 것들이다. 세탁기를 포함한 어떤 기계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삶을 살며 우리는 일상을 반복한다. 다시 말하면 반복하는 일상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시간이 흘러갔다. ....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 사람을 위한 빨래를 한다. 아직 스스로 빨래를 할 수 없는 한 사람을 위해 아내와 내가 세 사람 몫의 빨래를 하는 것이다.

세 가지 빨래가 있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빨래, 스스로 하는 빨래,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빨래.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빨래는 다른 사람을 위한 빨래다. 그때 빨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모든 빨래가 이미 그렇다.

 

- 금정연, <제 세탁 인생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p.43

 

 

마음에 드는 빈집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과 그곳을 채우며 사는 일이 재미있으려면 마음을 좀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게 있다. 비어있기에 채울 수 있다. 비어있어야만 채울 수가 있다. 비어있는 집 도면처럼. 나는 빈집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엇을 채우고 싶은지를, 무엇을 수납할지 말지를. 그리고 이 결정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분명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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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하나의 냉장고를 운용하며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나만의 냉장고를 갖는다는 건, 내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걸 의미한다. 그 안에 요즘의 내 식문화가, 더 나아가 마음 상태까지 고스란히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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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속의 음식물이 모습을 잃는 방식은 참 제각각이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가장 설렐 때 먹어야 한다. 먹어 치우는 게 아닌, 먹고 싶을 때 먹기. 냉장고 속의 장면은 요즘의 내 기분을 그대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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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산게 이 안에 있음을.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은 우선 냉장고라는 한정적인 수납장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식생활과 냉장고의 오늘이 보기 좋게 순환할 수 있다. .. 결국은 모든 것에 자주 눈을 두어야 한다. 신경을 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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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살림은 냉장고를 대하듯이 이루어져야 한다. 냉장고에는 내가 고른 음식물이 들어있다. 그중에는 먹고 싶어서 산 것도 있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도 있고, 매일 나를 살리는 것도 있고, 내가 남긴 것도, 다음을 위해 보관하는 것도 있다. 매일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들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집의 모습과 닮았다.

나만의 냉장고 운용하기와 집 가꾸기의 비슷한 점이 또 하나 있다. 좋아하고 먹고 싶은 것을 눈에 띄게 진열하듯이, 나의 집에도 곳곳에 좋아하는 물건이 가장 가깝게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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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잘 보여야만 있는 걸 알고, 알아야만 자주 손이 간다 ... 책이란 건 펼쳤을 때 비로소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물성이 있지만, 그 자체로도 메시지를 준다고 믿기에 집 곳곳에 책장을 마련해 둔 것이다.

보기만 하면 금방 기운을 차릴 수 있는 것들을 수시로 마주보고 싶다. 우리 집에서만큼은 당당하게 표지를 자랑하며 서 있는, 요즘 좋아하는 책을 보면서 오늘 자 한마디를 얻고 싶다 ... 케이스 안에 넣은 책을 바라보면 '요즘의 나'라는 상태메시지를 보는 듯하다. 때에 맞춰서 책들을 바꾸면서 요즘의 나를 나에게 보여준다.

책방에 가는 걸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 책방 산책은 어쩌면 내 것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일단 마주 보는 경험이다.

... 그렇게 만난 한 권의 책을 조금씩 집 안에 모으면서, 나를 일으킬 '보기' 하나를 더한다. 좋아하기에 자주 눈에 두도록 하는 건 어쩌면 마음이 힘든 날을 위한 안전장치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가까이 두기 위해서는, 조항하는 모양으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전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쉽사리 하루를 포기하고 싶은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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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면 일단 사 보는 성격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서 ... 사들인다. 이게 최근 나의 수집 대상이고, 집에서 이루어지는 유쾌한 취미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냉장고처럼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보기 편하게 분류해야 하고, 번지가 쌓이진 않았는지 가까이 쳐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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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살림에는 끝이 없는 게 당연하다. ... 내가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 그 안에서 즐거워지는 것에 가까이 눈을 두고, 가능하면 조금씩 다르고 비슷하게 정리하며 매번 다르게 뽀득뽀득해지고 싶다. 부지런히 좋아하는 장면을 갈아끼우고, 한때의 부풀었던 마음을 자주 기억하면서, 동시에 나를 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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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의 좋은 점은, 모았기에 두고두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주 볼수록 수집하길 잘한 셈이 된다. 내가 무언가를 수집하는 목적은 보고 싶을 때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특히 실용서라는 건,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보다는 분명한 기운을 받으려고 보는 책이다. 그 기운은 단 한장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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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의 좋은 점은, 좋아하는 걸 스스로 인정해주는 마음을 내 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세밀해지는 걸 발견하는 일. 수집은 결국 나의 여러 모습을 모으는 일이다.

 

- 임진아, <집과 함께 숨 쉬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남길 것>,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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