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엄마아빠의 반대를 무릅썼다.
부모자식의 연을 끊자고 우시는 데도
내가 엄마아빠와 연락을 끊고
이 사람을 선택했다.

이 사람은
많이 배우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지만
투박하게 진실하고
소박하고 용감하고 계산없고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랑을 주었다.
맨발로 흙을 밟아보라 하고, 제일 예쁜 토마토를 먹어보라고 따주었다.
자신이 맺은 소중한 관계와 세계를 다 보여주고
나를 그 세계에 깊이 받아들여 주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은 평행선이던
똑똑한 남자들과는 달랐다.

보다 어른이었다. 나이도 많지만.
품이 넓은 어른 남자.
내가 한없이 까불어도 예쁘다 예쁘다 하는 남자.
평생 주치의가 되어주겠다고
아주 먼 미래를 걸고 약속해주었다.
참 고마웠다.

가족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피로 나눈 관계가 아니어도
아끼고 보듬어주는 관계가
진짜 가족이 아닐까.
전화하면 욕을 하는 엄마보다,
내가 숨만 쉬고 있어도 고마워하는 이 사람이
더 가족같았다. 어느정도의 시간동안 남편은 진짜 내 가족이었다. 이 사람만 있으면 됐다.



그리고 좋았던 날들은 거기까지.


+


식구가 된 다음부터는
이 사람의 세계에 나는 없었다.
내게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고
관심을 딱 끊었다. 저녁마다 술. 술.

늘 차를 탔고 더 이상 함께 걷지도 않았다.
사실은 걷는 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것을 힘들어하면 내가 부족해서 그런거라고 했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어쩌다 한번 도와주면, 늘 그래온 것 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고, 그때 뿐. 꾸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열심히 하고 잘 하려고 애쓰는, 부양의 책임감이 크고 농사에 성실한 사람이다.
술담배 좋아하고, 퉁소를 불고, 혼자 놀고,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사람들이랑 술마시는거 좋아하는 한량 기질의 사람이다.
그리고 평생 자기 손으로 자기 삶의 자리를 정돈하지를 않았고, 정리정돈할 줄도 모르고, 정리정돈 할 필요도 못느끼고, 농사일 말고는 전부 다 아내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지극히 보통의 한국남자일 수도.

+

이제는, 남편의 세계에
나와 아이들이 들어가 있지 않을 뿐이라는 걸 안다.

이 사람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못돼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마음닿은 세계의 범위가 다른 걸, 경험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다른 걸, 한두번 노력도 너무 어려워하는 걸 안다.
착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놀고 추억을 쌓고 싶은 욕구는 무의식에도 의식에도 안들어있을 뿐이다.


+

누구보다 가족이 되고 싶었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오래 괴롭고 외로웠다.
내 감정을 소외시키고
꾸역꾸역 눈앞에 닥친 숙제를 해치우고
작은 기쁨을 어떻게든 찾아가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7년.
8년차를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겨워서 못참을 지경이 되었다.
"대체 왜 이렇게 살고있지?"하고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물어보고 있다.

+

돌아보니, 살림하기 싫어서 몸부림 친건,
어쩌면 남편에게 반발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역할분담이 주는 확실한 단절이 싫어서.
이미 단절 상태인 것도 모르고.

내가 노력하면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다.
내가 달라지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최선을 다했나? 할만큼 했나?
7년이 지났어도 또 묻고 물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으면 또 할만큼 해야 하나.
한번 더 잘해볼까 하다가도 숨이 턱 막힌다.


+

나는 남편한테
짜증과 윽박과 무관심 대신 다정함을 원하지만
남편은 부부가 사랑만으로 사는거냐 한다.

나는 하루종일 앉을 틈 없이 분주해도
남편은 농한기 몇달 내내 휴식이다.
나는 그저 사장님 모시는 일개 가정부.
월급 없는 가정부.

술줄이고 음주운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몇번이나 사고를 내고서도 전혀 변함없고 오히려 당당하다.

아이들과 놀아달라고 부탁하면
어머니댁에 맡겨놓고 애들은 티비를 보고 자기는 술마시러 가거나, 스마트폰으로 애들한테 뭘 계속 보여주고 자기 혼자 논다.

관계맺으러 들어가지 않는다. 나한테 그러는 것 처럼 아이들한테도 몸만 같이 있을 뿐 겉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진짜 응원이 아니라 내가 이러든 저러든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겉돌고, 불만을 눌러놓은 관계속에서, 말을 걸면 튀어나오는 짜증에, 아슬아슬하다.

+

나는 배우고 싶고, 성장하고 싶고, 설레고 싶다.
활짝 웃고, 더 많이 걷고 싶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느끼고 싶다.
통하고, 살아있고 싶다.

아이때문에 산다는 말을 하면서
더 참고 살고싶지 않다.

+

아마 우리는 생각보다 얼마 못갈지도 모른다.
결혼 초부터 서로 알았다.
적절한 시점이 문제였다.
아이들을 핑계로 유예기간을 늘려보았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참는 대신, 그 동안 아이들이 많이 커줘서 고맙고, 철따라 시골살이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났고, 언니들을 얻었다.

+

관계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
거의 변하지 않는다.
나아지지 않는다. 되풀이할 뿐이다.

+

나도 어쩌면, 다르게 보면,
남편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 편하게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남편도 아이도 땅도 집도 일도 있는데. 밥 안굶고 사는데. 힘든 농사일도 안하면서 대체 뭐가 힘드냐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내가 문제인가 했다.
아내와 아이가 최고인 아빠를 보고 자라서, 화목한 가정에서 너무 곱게 자라서, 공부만 해서 할 줄 아는게 없어서, 진짜 힘든 걸 못겪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는거 아닌가 싶었다.

남들 다 하는, 남편이 잘하거나 말거나 사랑이 있거나 없거나 살림하고 애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역할을, 내가 어디 문제가 있어서 못견디는거 아닌가.
다른 일 다른 관계에서 힘을 얻으면서 살면
또 살아지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해도 극복이 안된다.
계속 아프다.
피가 철철 흐르는 마음은 잠깐 딱지가 앉기 무섭게 다시 덧나고 덧난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생기충전  (3) 2015.02.06
시간의 밀도  (0) 2015.02.05
잘 배우는 사람  (0) 2015.02.03
홈레코딩 장비 샀다!  (4) 2015.02.01
글이 날아가서 속상  (0) 2015.01.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