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존에 대해서.


책에 흔적이 남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흔적없이 보고 흔적없이 보관한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을 빌려주는 건, 마음을 크게 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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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장자책을 남편이 읽겠다고 가져갔는데, 차 안에 두고 이리저리 굴려서 짐 속에 파묻혀 있는 걸 몇달만에 찾았다. 겉은 시커먼 흙먼지 투성이에 안쪽으로 습기가 들어가서 표지부터 1/3 정도는 우글우글해졌다. 모양이 다 망가져 온걸 보고 온 몸에 맥이 탁 풀렸다. "이건 자기가 가지고, 내꺼는 새로 하나 사 내라!" 하고 홱 돌아섰지만, 사실은 이렇게 될 줄 빌려주면서부터 알았다. 이 사람의 차는 블랙홀이다. 들어가면 사라진다. 이 사람의 의식에서도 차 안에서도 증발한다. 혹시 발견되더라도 3만년 후에 모양이 뒤틀려서 나온다. 그래도 읽겠다는게 기특해서 속는 셈 치고 내준 거고, 알고도 내준 내 잘못이다. 말만 그러고 말았다. 이렇게 뒤틀려서라도 돌아온게 어디야. 남편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큰 마음으로 내 소중한 책을 빌려줬는지 평생 모를거다. 몰라도 된다. 이제 빌려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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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아닌 이상 책에다 밑줄 긋거나 표시하지 않는다. 책에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이 '티'로 여겨져서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내용이 흘러가면서 소용돌이의 정점이 되는 중요한 부분은 다른데 옮겨 써놓거나 눈으로 기억하지, 책 자체에다 표시하지는 않는다. 표시하면 다음에 볼 때 그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소용돌이의 정점으로 다시 빨려드는 즐거움이 약해진다.

하지만 목적이 다른, 외워야 하는 책은 예외다. 있는 힘껏 색색깔 밑줄긋고 표를 그리고 그림을 그려서 한눈에 그 부분의 내용이 들어오게 압축압축 결론결론 한다.

책이 잘 펴지라고 손바닥으로 책장을 다리미질 하는 것도 절대 내게는 없는 일이다. 그저 살그머니 마지막 책장까지 본 듯 안본 듯 한장 한장을 조심히 넘겨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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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일에 마음이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몇몇 이용자가 책을 (내 눈으로 보기에) 너무 험하게 다루는 거였다. 책장 다리미질도 책표지까지 주름지도록 세게 하고, 읽은 곳을 표시하면서 책장을 접거나 책표지를 넣어서 책의 모양이 변하기도 했다. 제 때 돌아오지 않고, 그림책 등이 흐물흐물해지고, 뭔가가 안팎에 묻었다. 책을 험하게 읽는다고 책을 잘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는 것만 해도 속상해서 가슴에서 화살이 돋아났다. 누구를 쏘던가, 내가 맞던가.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내 책은 내가 어쩔 수 있지만 도서관 책은 다 같이 아끼는 거다. "아무도 안봐서 새것인 채로 낡아가는 것 보다는, 사람 손을 많이 타는 것이 책한테도 도서관한테도 훨씬 좋은 일이다!" 하고 마음을 바꾸니, 거기에 갇혀있지 않게 되었다. 책을 좋아해서 아낄 수 있도록 한사람 한사람이 책이 더욱 더욱 좋아지는 계기를 다양하게 만들고, 그래서 책이 더욱 더욱 손을 잘 타도록 하는게 내 일이겠구나, 했다. 책 험하게 보는 장면을 만나면 바로 그자리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속으로 무척 어려워하면서) 얘기도 했다.

책이 비명횡사하지 않고 천천히 잘 죽어가는 것이 책이 잘 사는 길이라는 아니러니를 본다. 책도 잘 죽는게 잘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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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도 그렇겠다. 새것으로 와서 새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한번 펴보지 않고 십년이 지나는 책도 많다) 내 손을 잘타서 잘 숨을 거두는 것이 책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것이겠다. 빌려주고 얘기가 풍성해져서 돌아오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과천에 오면서는 작정하고 안펴본 어려운 책들을 데리고 왔다. 덜덜떨면서 용기내서 밑줄도 그어볼까 한다. 내 스승님들이 공부책이 스승님을 만나서 온 몸에 흔적을 입고 스승님의 문장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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