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머리가 어깨까지 온다. 이제야 가능하다. 백미터 달리기 전에 운동화 끈 묶는 것 처럼 비장하게 질끈 묶어가면서 세달을 기다렸다. 때가 됐다. 엊그제 토요일, 마음먹고 자르러 갔다.

"층을 많이 내고요, 숱도 쳐주세요. 샤기컷이요."

층이 층층이져서 길이가 들쭉날쭉하고 한묶음으로 다 묶이지 않고 여기저기 빠져나오는 단정치 못하고 불온한 머리를 기대하면서 안경을 벗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검은건 머리요 살색은 얼굴. 앞이 흐릿하다. 자르는 동안에 "그렇게 말고 이렇게요" 하고 보면서 바로 수정할 수가 없다. 불통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신앙심을 키우는 나의 저질시력. 잘 보이지를 않으니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믿는 수 밖에. 사각사각 자르는 동안 그저 숨을 죽이고 두근두근 기다린다.

"다 됐어요."

앗 드디어. "5초 뒤에 공개합니다"와 같은 말이다. 안경을 끼고 거울을 보니 두둥, 짧고 단정하고 말끔하기 그지없는 단발머리다. 아이 oTL 의사소통 실패! 한번 더 확인했어야 했어!

헝클어진 머리가 되고 싶은 욕망은 물거품이 됐다. 또 세달 다시 기다려야겠다. 야한 생각 많이 하면서 꾹 참고 길러야지. 마음에는 별로 안들지만 짧으니까 찰랑찰랑 가볍고 시원하기는 하다.

...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반전. 세달 전에도 이 미용실에서 같은 상황을 겪고 같은 다짐을 했다. 그 전에도 다른 미용실에서 같은 상황을 겪고 같은 다짐을 하고는 여기로 미용실을 옮긴거였다. 무한 루프에 끌려들었나! 옮겨도 옮겨도 같은 상황이다. 불온하려고 할수록 점점 더 강도높게 단정한 머리로 돌아온다.

세달후에는 꼭 벗어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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