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농장 7월 월례회가 끝나고 돌아온 7월 15일, 밤 열한시 쯤이다. 조금 늦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책은 나간다. 긴팔 잠바랑 긴바지를 챙겨입는다. 농장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어머니댁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는 바람에 애들도 잠이 늦었다. 엄마 산책하러 가는 길에 현관 앞까지 배웅 나왔다. 왼쪽 뺨은 온유, 오른쪽 뺨은 한결이가 맡아서 "바바박 뽀뽀"를 해준다. "바바박 뽀뽀"는, 숨을 한번 들이쉬면 바닥까지 다 내쉴 때까지 쉬지 않고 온 얼굴에 퍼붓는 뽀뽀 폭풍이다.

 

"엄마! 잘 다녀와! 차조심하고. 얼른 다녀와. 내 옆에서 자. 알았지?"

"아니야! 내 요페(내 옆에)! 내 요페(내 옆에)!"

 

가지 말라고는 한마디도 안한다. 얘들이 내가 키운 아들이다! 음하하.

 

 

+

 

 

핸드폰의 후레시를 켜고 뽕나무 언덕을 타박타박 내려가자마자,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린다.

 

"훵!"

"아아아아아아악!!!!!!"

 

퍼뜩 알았다. 멧돼지다. 개가 힘줘서 '멍' 하고 짓기 직전에 위협하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랑은 비교할 수 없이 거칠다. 음역대가 훨씬 낮고, 크고 강하게, 순간 짧게 내뿜는 소리다. 날짐승이다. 날짐승이 위협하는 숨소리다. 뒤로 돌아서 숨도 안쉬고 언덕을 뛰어 올라간다. 남편이 알몸으로 장우산을 손에 들고 있다. 씻고 있다가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뛰쳐나온 모양이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반쯤 열린 현관문 뒤에 어린이들이 토끼눈을 하고는 빼꼼빼꼼 내다보면서 서있다.

 

"남편! 멧돼지가 '훵!' 했어!!!"

"니, 등을 보이면 어떡하노! 짐승한테 등을 보이면 어떡하노! 인젠 좀 일찍일찍 다녀라!

후레시는 안켜고 갔나? 불 보이고 발소리 들리면 알아서 피하는데!"

 

집에 들어왔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는데, 어린이들이 난리다.

 

"엄마! 멧돼지가 나타났어? 엄마를 막 따라왔어? 안다쳤어?"

"응 괜찮아. 멧돼지가 '훵!'하고 무섭게 소리를 내서 깜짝 놀란거야."

 

한결이랑 온유를 안고 있는데 덜덜 떤다. 

 

'왜 애들이 떨지? 얘기만 들어도 무섭나?'

 

손을 내려다보니 내가 떨고 있는 거였다. 손이랑 팔이랑 온 몸이, 눈에 보이게 덜덜덜 움직이고 있다. 떨고 있는 건 나라는 걸, 전혀 몰랐다.

 

 

+

 

 

오늘은 산책 못가나, 생각하니까 분하다. 무서워서 분하다. 이대로 겁먹고 주저앉으면 안되겠다. 무서워서 다시는 밤산책 못가면 나는 어떻게 사나.

 

"남편. 진짜 멧돼지가 맞는지 한번 같이 가보자. 지금도 거기 있나, 한번만 같이 가보자."

"니...... 아니다. 알겠다. 가보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같이 가줘서 고맙다. 남편은 팬티만 입고, 바로 같이 후레시를 켜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봤다. 현수언니 기태아저씨 부부가 두줄 심은 감자밭에, 내가 지나다니는 길 바로 옆부분이 방금 파헤쳐져서 젖은 흙이 드러나 있다. 감자 먹으려고 왔구나.

 

+

 

 

 

다음날 아침. 다 쑤셔놓고 간 흔적. 다섯시 반부터 해가 쨍쨍해서 아침 10시인데도, 젖어있는 속흙이 덜마를 정도로 깊게 움푹 패인 발자국이 선명하다. 대략 앞발 뒷발이 떨어져 있는 거리를 봐서 크기를 가늠해보니, 한결이가 엎드린 것 만 하다. 역시 큰 놈이었어!

 

 

풀이 없는 맨 흙이 다 멧돼지가 파놓은 곳이다.

 

 

현수언니가 나중에 멧돼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말해준다.

 

"멧돼지가 산에 붙어있는 쪽부터 조금씩 조금씩 파먹어 들어왔어. 우리, 감자 하나도 못캤어. 전부 다 멧돼지가 헤쳐놓은거야."

 

그렇구나. 마지막으로 사람 다니는 길 옆에까지 온건가보다.

 

 

 

그 다음부터 밤에 언덕을 내려가고 올라올 때, 후레시를 켜서 밭을 구석구석 비추고 일부러 발을 쿵쿵 굴러대면서 걷는다. 짐승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단다. 내가 모르고 너무 사뿐사뿐 다녔구나.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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