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거의 보름달. 어제는 보름달. 오늘은 절구찧는 옥토끼 엉덩이 쪽이 약간 줄어든 보름달. 3일 내내 밤이 무척 밝다. 길 끝에서 끝까지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도 그림자가 선명하다. 뚝방길 옆 인삼밭은 차광막 아래에 두둑에 깔린 지푸라기 그늘까지 다 보인다.

 

늘 하던대로 밤산책 중. 문득, 안보이던 밤의 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달빛뿐이지만 솔멩이골은 얼마나 색깔이 많은지. 가까운 산은 검은색, 점점 멀수록 조금씩 조금씩 밝아지는 회색. 달이 뜬 하늘은 노르스름한 회색빛 남색, 왼쪽 오른쪽 하늘은 어스름하게 짙푸른 남색에 별이 별사탕같이 박혀있고, 달을 등지고 보는 반대쪽 하늘은 검푸른 남색이다. 논에 자라는 모는 검은색이지만 논물은 어룽어룽 빛이 난다.

 

안보이던 색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에는 이어폰을 끼고 고병권 선생님의 니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계보학과 역사 부분이다. 니체가 말하기를, 학자의 사상을 알려면 그 학자의 말 뿐만 아니라 자라나고 살고 있는 환경, 지형, 기후를 다 연구해야 그 사람이 뭘 말하는 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럼 누군가 나를 연구한다면, 여기에 와봐야 하나. 그렇네. 누군가가 머무는 곳에 가보면 그 사람을 더 알 수 있겠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내 생각이랑 말 속에 들어가는구나.'

 

온 하늘과 들판이 갑자기 낯설다. 나는 지디기말에서 아랫말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너무 환해서 쳐다보면 잔상이 한참 눈에 남을 정도로 눈부신 달을 이마 앞에 두고 논과 논 사이를 걸어가고 있고, 사방은 검은 색부터 회색까지 섬세한 색차이로 멀어지는 산에 둘러싸여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이 말과 생각에 들어간다면, 나는 의연하면서도 섬세할 수 밖에 없겠다. 정말?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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