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몇 분 쳤다, 하면 한달은 손 끝에 뭐 닿을 때 마다 고통스럽다. 손가락이 순두부 수준이다. 그래도 기타는 치고 싶어서 방법을 찾아봤다. 얇은 줄을 쓰거나 실리콘 골무를 끼고 치면 오래 칠 수 있다고. 소리가 영 마음에 안들던 차에 줄을 바꿔보기로 했다.
엘릭서 나노웹 포스포브론즈 C.light. 제일 얇은 E.light (0.10) 다음으로 얇은 줄(0.11)이다. 코팅되어서 수명이 길고, 소리도 밝고 좋다고 한다. 왕초보인 나에게 과분한 가격이지만, '악기는 소리가 좋아야 자꾸 연습하고 싶다고. 수명이 길면 좋지.' 하면서, 얇은 줄을 사려고 했던 처음의 뜻과 다른 이유로 이 줄을 선택하고는, 두팩짜리로 손 떨면서 주문했다.
주문하고 나서 5개월을 "갈아야 하는데.." 하고 때때로 신경만 썼다. 그러다 "내가 해봐야지." 하고 마음이 바뀌었다. 요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다보니 퍼뜩 보였다. '내 기타의 줄을 잘 갈아줄 전문가에게 맡기려 한 내가, 나를 쓸모없게 만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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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울 집에 놀러온 정재님이 눈에 떡 띄는 곳에 꽂아놓은 내 핑거스타일 기타 연주곡집을 발견하고 빌려갔다. 이 책을 사고서는 의욕이 넘쳐 기타줄도 산거다. 기타책도 때를 잘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 '조금만 더 때를 기다려라. 아직 펴서 읽어주지 못하는 주인을 용서해라 기타책.'
정재님이 연주곡집을 펴서 문리버를 딩딩 친다. 옆에서 듣다 깜딱. "우와! 이렇게 치라고 써있어요? 진짜요? 악보를 읽은 거에요? 어떻게 읽는 거에요?" 하고 감탄하다가 TAB악보 보는 법을 대충 배웠다. 글로 된 설명을 봐서는 당최 모르겠더니. 정재님이 몇마디 알려주니까 쉬웠다.
내친 김에 "기타 줄 바꾸는 것도 가르쳐주세요. 한줄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제가 할께요!" 그래서 바로 대 작업을 시작했다.
요렇게 못 빼듯이 브릿지 핀을 빼서 헌 줄을 빼고, 새 줄을 넣고 핀을 꽂았다.
새 줄을 바깥쪽 방향으로 감아서 뺀다.
사람들 다 가고, 나혼자 마저 줄 갈고, 튜닝해서 드르릉 쳐봤다. 두근두근두근
아이고 새 줄 소리 좋구나 >_<
그냥 좋아서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기분 >_<
줄이 얇으니까 확실히 손가락도 덜 아프다.
나 오늘부터 기타줄 갈 줄 아는 여자사람으로 거듭났다. 하하하! 해보니까,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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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들은 문리버 멜로디가 머리속을 둥둥 떠다녀서, 멜로디를 한 세번 해봤다. 안아파서 세번이나 했다. 아 좋다, 문리버. 너무 좋다. 나도 핑거스타일로 언젠가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나 하, 역시나. 줄을 바꿔도 세번이 한계였나. 금세 피맺힌 금이 좍좍. 손님이 가고 손상이 왔네.
나중에 꿈이 가야금 익혀서 뜯는건데 벌써 걱정이다. 기타도 이정돈데 가야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도 피터져서 굳은 살 만드는건 싫다. 손 끝이 무뎌지면 피아노 칠 때 감각이 둔해져서다.
결론 : 실리콘 골무를 주문하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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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즐거운 점심밥상. 원래는 민지언니, 선주언니, 나 셋이 간단히 김치볶음밥 먹을 예정이었다. 여차저차 판이 커져서 남편, 보리언니, 정재님도 같이 만났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여럿이 얼굴을 반찬감아 즐겁게 먹은 마법의 밥상. 선주언니의 골뱅이 무침이 위기의 식탁에서 빛이 났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