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몸이 납작만두, 기분은 롤러코스터.

몸은 비가 오려고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생리 셋째날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애들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서 오전 내내 납작하게 뻗어있었다. 등에 심포경 있다는 자리에 박제핀을 꽂은 것 같다. 내일은 공부하러 날아가야 하는 날인데!

"과수원에서 이틀 일하고 #만원 벌었어!
읍내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만 들어도 감격이 북받치는 현수언니의 이야기에, 옷만 겨우 갈아입고 비틀비틀 나섰다. 걷기 시작하니까 없던 힘이 솟는다. 내친 김에, 데리러 오는 언니랑 마주칠 때까지 송면중학교를 지나 이평슈퍼를 지나 삼거리식당을 지나 지나 걸어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살 것 같다. 이대로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끝도 없이 걸어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왔나.


+


대학을 여름에 졸업하면서 3주동안 국토대장정을 다녀왔다. 광주에서 임진각까지 걸었다.
귀농하려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한달동안 생명평화결사 탁발순례를 다녀왔다. 경기도 구석구석을 걸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고민을 안고 길 위에 나섰다. 끝도 없이 걸었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고, 만나는 이들의 사는 모습, 사는 곳, 지금 하는 고민을 만났다. 그리고 스쳐갔다.

내 고민의 모범 답을 얻지는 못했다. 길 위에서는 길 위의 삶이 있어서, 다른 생각할 틈이 없다. 생활이 단순하고 바빴다. 대신, 하루하루 긴 걸음을 마치고 눈비비고 다시 본 내 고민은, 자꾸 작아지고 가벼워졌다. 무겁무겁한 나도, 자꾸 우스워지고 가벼워졌다.


+


읍내에서 엄청 맛있는 청국장 백반을 먹고, 시럽 네번 펌핑해서 초 달달해진 카페라떼랑 초코와플을 사들고, 괴산귀농 8년차에 처음 보는 초록색 5월의 벚나무 터널을 지나면서 드라이브하고, 바닥까지 탈탈 흔들고 털어내는 이야기를 나눴다. 현수언니랑 환상의 데이트.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하원시간. 어린이집에 왔는데. 애들 데려가는 일에 남편이랑 소통이 안되었다. 어머니랑 전화 끊고 세걸음 걸었는데 울음이 터졌다. 수습안됨. 어린이집 선생님들이랑 엄마들 보는데 아이고...

"괜찮아요! 흑흑 흐윽흐윽"
눈물 콧물 닦으면서 현수언니 차타려고 차문을 열었는데

"민경씨! 그거 내 차야~^^" 하는 수진언니.
"아! 그렇구나. 흑흐윽 흑흐윽"

하, 완전 시트콤.


+


집에 와서,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니 엉엉 우는 나는 엄청나게 못생겼다. 누가 볼까 두렵네. 남편이 나쁘고 내가 힘들게 보일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표정도 하지 말고, 입도 꾹 다물어야지. 남편은 여기서 계속 살아간다. 사라지는 것은 나 뿐이니까. 이유는 내가 다 끌어안고 소리없이 사라져야지.


+


이사하고, 정리 대략 마치면,
좀 오래 오래 걸어야겠다. 한달도 짧겠다.
걸어가자. 걸어가자.

삶이 흘러가다 방향을 틀을 때니까, 나는, 걷자. 걷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생길 때까지, 혼자 숨어서 우는 대신에 자꾸자꾸 걸어가자.


+


"니 왜 그렇게 살이 빠졌나?"
상갓집에서 막 돌아온 남편이 묻는다.

눈에 보이나? 물어봐줘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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