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무침을 만드려고 채칼로 양배추를 썬다. 난동곰 형제가 옆에 와서는 의자를 놓고 올라와서 방해한다.
"꿀물 타줘." "내가 섞을꺼야." "내가, 내가!" "맛볼래." "매워, 물 줘." "초콜렛 꺼내줘." "햄버거 스테이크 꺼내줘." "이거 까줘." "테이프로 이거 붙여줘." "비켜!" "엄마는 내꺼야!" "꿀물 왜 안줘!"
정신이 사나워서, 아차 하는 사이에 그만 '설컹'. 양배추를 잡고있던 오른쪽 새끼손가락 끄트머리를 채칼에 베이고 말았다.
피가 철철철철철철철.
이미 많이 지쳐서 화낼 기운도 없고. 힘줘서 얘기나 한다.
"엄마는 음식만들 때 칼도 쓰고 이렇게 위험한 것도 써. 너네가 부엌에 와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자꾸 엄마 하는 일을 방해하면, 엄마가 정신이 없어져서 다쳐. 이것봐봐. 엄마 피가 막 나잖아. 인제 엄마가 요리할 때 '이거달라 저거달라' 하지마! 부엌에 오지마! 알았어?"
한결이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상황을 퍼뜩 읽는 일곱살 ㅋ
"엄마, 내가 호 해줄까? 호-"
온유는 내 얼굴에다 바람을 불어준다. ^^;
피를 보더니 난동곰들은 저만치 방에 가서 다른 걸 어지르면서 논다. 다시 부엌에 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나. 너그러운 엄마짓 하다가 피를 보았구나.
+
아이가 음식 만드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 왔을 때,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저어보고 먹어보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을 막지 않는 것. 맛있는 것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하고싶어 하면 만드는 과정에 들어오게 해주는 것.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나는 막지 않을 뿐이고, 아이는 일상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아 내는 힘을 스스로 키운다. 그래서 웬만하면 같이 만들어보고 간도 보게 하는 편이다. 내 상태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늘 한결같이 받아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말을 뒤집었다. 금을 확 그었다. 버럭 짜증냈다.
"요리할 때 부엌에 오지마!"
+
집중력 떨어지고 체력 떨어지고. 이 맥없는 화는 돌아보니 오늘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하루 이틀 쌓여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매일 저녁 남편은 늘 어딘가에서 일이 있다. 애들 자는 시간을 넘을 때 쯤, 늘 술마신 얼굴로 들어온다.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다. 눈도 안마주친다.
아침, 저녁, 주말을 지나면서, 피곤이 내가 하루에 회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만큼 조금씩 쌓이는 것 같다. 정신도 체력도 점점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다. 주말이 지나면 월요일은 죽을 것 같다.
이 시간 이 생활 이 관계를 다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몸일까, 마음일까.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따르고 좋아하는 예쁜 애들을 보면서도.
왜 나는 아이들만 보면서 사는 것이 의미가 없을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편해진다는 그 2-3년도 못참을까. 왜 아이들 생각해서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기어이 끝을 내고 싶을까.
+
휴지로 피가 멈추지 않은 손끝을 대충 감고 꾹 눌렀다.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집에 가는 중이야."
"하우스 팔아서, 내 전세금 돌려줘. 그리고 도지 얻어서 농사지으면 되잖아. 창익샘도 순귀형님도 그렇게 살고 있고."
쿡. 웃으면서, 어처구니 없다는 말투로 누군가에게 말한다.
"민경이가 하우스 팔아서 돈 달라네."
"민경씨가아?"
마을 언니 누구일까.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은 나를, 나와의 관계를 비웃음거리로 만드는구나. 애들은 다행히 멀리 있고, 남편은 얼굴 보기 힘드니까 말을 마저 한다.
"지금은 숙려기간이야. 나한테 몽땅 다 맡기고 아빠는 없는 기간이 아니고. 자기가 집에 와서 애들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잘 지내서, 나중에 엄마가 없더라도 애들이 아빠랑 있는게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는 기간이라고."
내가 있어주는 이 시간이 귀한 줄 모른다. 대책이 없다. 동네 모든 모임의 중심에 남편이 우뚝 서있다.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잠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무말 없이 전화가 끊어진다.
+
전화를 내려놓는다. 손가락 끝이 따갑고 욱신욱신 쑤신다. 양배추랑 오이를 마저 무치고 떡갈비를 굽고 밥을 퍼서 아이들이랑 저녁을 먹는다. 온유는 매워서 호호 불면서도 양배추를 연신 집어먹는다.
"맛있지?"
"진짜 맛있다!"
그리고 남편은 오늘도 역시, 두시간이 지나고 자기 바로 전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씻는 곳으로 들어가 이랑 손발닦고 이불덮고 눈 딱 감고 잔다. 들어와서부터 눕기까지 5분도 안걸린다.
"주먹이"랑 "도깨비옷에 구멍이 뽕" 그림책이랑, 옛날이야기책에서 골라 몇개를 더 읽어주고, 양쪽에 아이들을 두고, 불끄고 눈을 감는다. 온유가 가슴에 손을 슥 넣는다.
"뽀뽀해주면 찌찌 만지게 해줄꺼야?"
"한번만이야."
한결이가 먼저 잠들어서 소리가 없다. 한결이는 그야말로 머리를 땅에 대자마자 잔다. 창 밖에 달이 밝아서 그런가, 온유는 가만히 눈을 뜨고 있다. 곧 잠이 들겠지. 오늘 하루도 이제 끝이다. 잘 자자. 푹 쉬자. 내일도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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