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국내도서
저자 : 정세랑
출판 : 아작 2020.01.06
상세보기

 

11분의1

 

그런데 열한 명이 있으면, 한 명쯤은 마음에 들어오게 되어 있잖아요. 오빠11이 그랬어요. 왜 11이냐면 제일 조용해서. 항상 열한 번 째로 말하는 사람이어서. - p.20

 

누구와도 좀처럼 말다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좋아했어요. 농담으로라도 비열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배려해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라 좋았어요. 오빠는 자주 아팠는데, 그래서인지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귀신처럼 알아채곤 했었어요. -p.21

 

그 말 없는 사람이 우리를 이어붙이는 접착제였던 거예요. -p.21

 

펭귄 수컷처럼 돌을 선물하던 남자 때문에 제 나머지 연애들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p.23

 

 

리셋

 

어째선지 나는 왈칵 울어버렸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결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다음 불침번을 설 사람의 알람이 울리기 전에.

다시는 생산되지 않을 스니커즈 바닥이 닳도록 메세지를 지우고 나자 울음이 그쳤다. -p74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고 있잖아요, 그거 문명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소리예요."

누군가 말했고 나는 리셋 이전의 괜찮은 부분은 보존되었다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p.91

 

 

모조지구 혁명기

 

인면어들과 아직 완전한 화해는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고양이 인간을 통해 음향 기기와 음원을 잔뜩 구했다. 며칠 전에는 아바의 <I have a dream>을 틀어주었는데, "나는 천사를 믿어요(I believe in angel)"라는 가사에 인면어들은 괴성을 지르고 천사만 깔깔 웃었다. 천사가 나오는 노래는 팝송에 많을 것 같은데 영어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연달아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런 일로 시무룩해지지는 않는다.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걸 안 이후로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p.122

 

천사는 날개가 없을 때부터 천사였고, 천사가 내게 주는 안도감은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다른 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종류이리라 확신한다.

행복하다고 게을러지진 않았고 열심히 브로슈어를 발송하고 있다. 모조지구의 발사대에서 온 우주를 향해 광고가 날아간다. 달콤한 색깔의 캡슐에 담겨, 암흑물질을 뚫고 끊임없이 날아가는 브로슈어가 언젠가 당신에게 닿기를. - p.122

 

 

리틀 베이비 블루 필

 

첫사랑이 조금 더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사랑이 바래는 것은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므로, 이제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사랑은 유지되었다. 초혼 연령이 아주 약간 앞당겨졌으며 이혼율도 미미하지만 낮아졌다. -p.135

 

현재성을 압도하는 기억들을 담아두기에 사람의 의식이란 균열이 너무 많은 저수조나 다름없었다. -p.139

 

"그러니까, 저는 다 기억한답니다. 제 가슴속에는 언제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이 있어요. 젊은 날의 제가 최선을 다해 연기했던 한 줄 한 줄이 말예요.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대사들이... 그런데 요즘 주어지는 건 형편없어요. 언제나 누구의 평면적인 어머니, 악의에 가득 찬 시어머니, 냉혈한에 가까운 기업 대표 역할만 순번을 바꿔 들어오니까요. 아무 감정도, 정보 값도 실리지 않은 시시한 말들만 외우자니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이건 의미가 없어요. 모조리 잊었더라면 차라리 계속 해나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매번 처절한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요. 이대로는 안 돼요. 저와 뜻을 같이하는 다른 배우들도 있고요." -p.143

 

사람들은 그동안 여성 배우들을, 중년과 노년의 배우들을 변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이 대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파업은 해프닝처럼 시작되었지만 굳건히 계속되었고 업계 사람들은 그동안 쌓아뒀던 대본들을 다 내다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했다. 피하지방층이 얇아지며 우아하게 드러난 얼굴 뼈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섬세한 가로 세로 선들,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성대를 위해 합당한 것들이 쓰여졌다. -p.144

 

원로 학자들이 "이런 것은 진짜 학문이 아니다"를 외치며 아무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그건 진짜였다. 학설을 뒤집고 또 뒤집은 젊은 학자들은 원래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 p.145

 

그전에도 거대한 회사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시에 망쳤고, 매번 해결책 대신 미봉책만을 택했으며, 사람들은 시대가 흘러가는 진행방향의 굵은 화살표 위에 앉아 불행의 원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괴로워하며 더 괴롭게 만드는 액체를, 고체를, 기체를 삼켰다.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 -p.150

 

 

목소리를 드릴게요

 

돌아서자마자 연선의 얼굴은 희미해졌다. 그래도 손에 남은 감촉만은 전혀 희미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희미해질 기미가 없었다. -p.200

 

승균은 수용소를 둘러보았고, 연선이 보이지 않는 것에 기뻤다. 기쁨은 기쁨인데 다소 둔중한 기쁨이었다. 승균이 그 둔중함을 해석해내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p.209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수용소를 연선이 오기 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괴물들이 털을 기르며 연선을 기억하니까. -p.210

 

바라보는 내내 승균은 담뱃재가 연선에게 떨어질까 불안했고 그 노심초사가 무색하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 p.215

 

 

7교시

 

마을 가장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는 마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끝내는 모두를 구했습니다. -p.224

 

대멸종 이후 인류는 오래 내려온 유전자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파국을 불러온 공격성과 이기심을 물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종 다양성 보호에 기여한, 유난히 이타적인 사람들의 유전자를 역시 복잡한 절차를 거쳐 모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유전자가 아닌 익명의 공동체 유전자를 원했다. 닮은 대상이 아니라, 닮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p.226

 

날다람쥐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다람쥐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느꼈다. 나방이나 노린재 같은, 날다람쥐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고 아름답지 않은 종을 위해서라도. 어쩌면 인류가 정말 느린 자살을 택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속죄일 것이다. -p.227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승훈을 만난 건 여름이 막 시작될 때였고, 여름이 발을 질질 끌 때 승훈이 좀비가 되었기에 사귄 기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짧기 때문에 단계별로 곱씹어볼 수 있다. -p.240

 

그런 완결성이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 -p.250

 

정윤은 승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려 애썼다. 언젠가 그렇게 정윤을 똑바로 보던 눈을. 잠깐 함께한 것뿐이지만 승훈을 보면 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p.251

 

오늘 11시에도 그 애가 올까? 아직 화살이 하나 남았는데... 한 번 정도 활을 더 쏠 힘은 남아 있는 듯했다. 계단을 내려가 문틈으로 가까이서 승훈을 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오늘은 가능하고, 내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정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알았다. -p.24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