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R에서 훔 샘이 놀러왔다.

원래는 토요일 하루 자고 갈 예정이었는데
들어보니 딱히 다른 일도 없다 하고,
수다떠는데 불이 화락 붙어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잘 꼬셔서 세 밤을 더 자고 놀다가 갔다 ㅋ
느긋한 나랑 느긋한 훔 샘이 잘 만났다 ㅋ

훔 샘이랑 있으니 여기저기 잘도 다녔다.
괴산 이사오고나서 처음으로 집 뒷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꼭대기에 올라 마을 풍경에 감탄감탄.


하얀 눈 위에 딱 우리 발자국.



바삭바삭 낙엽밟고 빠득빠득 눈도 밟고 나무 사이 길로 걸어걸어 오르다보면 어느새 동네가 다 보인다.
해냈다! 하는 기분.
산을 오르면 이런 뿌듯하고 충만한 기분이 드는 구나. 아주 좋다!

훔샘 고마워요 :-D



+


때는 2014년 12월 19일 목요일, 수유너머R 학술제 기간.
나는 빈가게에서 맛있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파티 끝나고 남은 여러가지맛 주먹밥을 잔뜩 싸가지고,
배고픈 청춘이 기다리는 빈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정 넘어 두시가 다 됐는데 R 창문에 불이 켜있다.

'누가 아직도 공부하나? 간식 나눠주고 가야지.'

들어갔더니 달리, 훔, 아까 마르크스 세미나에서 만난 알바트로스님이 있다.
간식 보따리를 풀어놓고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훔 샘이랑 둘만 남았다.
요새 공부하고 있는 것, 공부하면서 즐겁고 힘든 이야기를, 세상 고민을 다 싸짊어진 것 처럼 엄청엄청 진지하게 나누면서 네시를 훌떡 넘겼다.

- 여행가려구요. 언제 솔멩이골 놀러가도 돼요?
- 네 그럼요.
- 진짜 가도 돼요?
- 진짜, 꼭 와요. 아무때나 휙 날아와요.
- 네. 가기 전에 연락 드릴께요.

그 이야기가, 오늘이 되었다.
그 새벽에 우리가 만났기 때문에 훔샘도 솔멩이골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세미나 듣겠다고 일찍 쉬었으면,
켜져있는 불빛에 누구인지 궁금해서 들어가보지 않았으면,
부담없이 적당한 순간에 나왔다면,
이 친구가 나를 찾아와 먹고 자고 걷고 이야기하는 이 시간은 없었겠지 ㅋ



+

훔샘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빈집에 돌아와서 다섯시쯤부터 잠시 눈을 붙였다. 19일 금요일 오후 한시반, 스피노자 오픈세미나에 참석했다. 학술제 마지막 세미나다.

박카스 샘이 얘기해준 스피노자는 너무 재미있고 가슴에 남은 말이 많았는데 ㅠㅠ
오고가는 단어와 개념이 낯설고 나한테는 어렵다. 잘 못알아듣는다. 이야기 가닥을 못잡고 멍해지면서 피곤이 몰려와서 꾸벅꾸벅 졸았다. 의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자. 이제 결단을 하자고! ㅠㅠ'

동그랗게 둘러앉은 자리에서, 도중에 나오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ㅠㅠ

'이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계속 졸고 앉아 있으면 부끄러워서 R 다시 못오겠다..'

하, 부끄러워서 다시 못온다니.
안돼 ㅠㅠ
너무 슬프다 ㅠㅠ

정신이 든다.
도중에 나가는 부끄러움보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끝까지 앉아서 조는 부끄러움이 지금은 훨씬 더 크다.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1초라도 빨리 사라져야 한다.

살그머니 아무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왔다.
빈집에 와서 더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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