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아픈 적이 별로 없었는데, 요 겨울 내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이 너무 신기해서 적는다.

감기 크게 앓고 난 후에, 생리를 마치고도 맑은 분비물이 많은 상태가 2주나 이어졌다. 팬티랑 바지를 하루에 세번씩 갈아 입을 정도. 수도꼭지가 새는 것 처럼 몸에서 물이 샜다. 증상은 "부녀자의 대하". 더 깊이 들어가면 "허로증". 원인은 물과 불의 균형추가 무너진 것이다. 몸이 허약해져서, 지나친 과로로 인해 몸이 피로해서, 그리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해서.

제때 밥먹고 일찍 자기를 2주. 변화가 없다. 책을 찾아가면서 침을 놨다. 행간, 삼음교, 족삼리, 음곡, 음릉천, 자궁혈, 기충혈. 다리 안쪽으로 좌아악.

침을 놓으니 근육이 쫙 긴장하는 느낌이 나면서, 대하는 바로 그쳤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조금씩 시작이다. 임시 방편이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그대로고 그 안에 있는 나도, 내 생각도, 그대로다. 병이 나는 환경이 그대로라면 아무리 침을 놔서 치료를 해도 그때 뿐일 테다. 어떻게 하면 나는 나을 수 있을까? 내가 뭘 하면 될까?

나는 편안하고 따뜻한 내 집에서, 예쁜 내 아이들과 함께 세끼 따뜻한 밥 먹으면서 따뜻한 물에 씻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몸은 눈감고 덮어두고 싶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있구나 싶었다. 마음 대신 몸이 아프다. 너무 오래 참고 오래 꾹꾹 눌러두었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잘 왔다. 새 시작을 앞두고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낫기 어렵다면, 시절이 변하고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내가 되면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병이 아니라 다른 병을 만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겠지. 그럼 또 방향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아픈 적이 별로 없어서 몰랐는데, 맷집이 좋은 편이 아닌 것 같다. 한번 앓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웬만하면 화날 일 없고 서운할 일 없고 즐거워하는 초긍정 기질이 괜히 달린 게 아니었다. 감기가 몸에 들어올 때 코로 목으로 단계를 거치는 것 처럼, 마음 아파서 몸까지 아프지 말라고 초기 감정단계에서 막아주는 면역력이구나 한다. 맷집이 약하면 방어막이라도 튼튼한 몸. 그러니 살던 대로 발랄하게 살아야 제 명을 살고 가겠구나 싶다.

남은 생명을 걸고 내 길을 깨닫게 해 준 결혼생활에 감사한다. 여태까지 잘 버텨온 힘이 된, 근거없는 긍정기질 유전자를 물려준 엄마아빠한테 감사한다. 더는 못버티고 여기저기 줄줄 새고 삐걱대는 내 몸에게 감사한다. 이 삶을 내려놓는 용기를 주어서.

어쨌든 멈춰있지 말아야겠다. 일찍 자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산책을 하고, 밥을 해먹고, 친구를 만나 웃고 떠들고, 일기를 쓰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일을 해야지.

지난주 관문학당 동의보감 수업시간에 들었는데 가물가물하다. 몸을 바꾸어서 정신을 낫게 하는 것과 정신을 바꾸어서 몸을 낫게하는 것의 차이. 어느 것도 쉽지 않다고.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고. 거기서 더 들어간 이야기가 있었는데. 필기해둔거 자세하게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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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에 집을 구했다.

방은 아담하다. 직사각형인데, 짧은 편 이쪽 끝에 책상 놓고 저쪽 끝에 이불 펴면 꽉 찰 것 같다. 발이 닿는지 누워볼걸 그랬다.

꼭대기 5층이고 남서향이라 해가 잘든다. 벽이랑 천정을 돌아가면서 훑어봤더니 곰팡이가 핀 흔적이 하나도 없다. 뽀송뽀송. 빨래가 잘 마를 것 같은 작은 베란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혹시 여름엔 죽어날까;

내 키보다 작은 작은 냉장고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폭에 싱크대 옆에 작은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작은 부엌이 있고, 들어가면 문을 닫기가 어려울 것 같은 아주아주 작은 화장실도 있다.

짐을 쌓아둘 공간이 아예없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둘 수 있는 구조, 딱 그만한 크기다.

수전은 부엌도 화장실도 왼쪽온수 오른쪽찬물 따로 틀어야 하는 옛날 수전이고, 벽에는 110볼트 콘센트가 부착되어 있다. 등도 전부 옛날 형광등. 어디가서 잘 보기 힘든 것을 볼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다.

미니미니 초미니 아파트.
'여행짐만큼만' 하고 마음만 먹고 한살림 끌고가는게 아니라, 정말로 여행짐만큼 갖고 들어가야한다 ㅋ 이렇게 오래되고 작은 집에 살아보기는 처음이라 은근히 설렌다.


이사는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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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아름다운 어스름.
저물어가는 따뜻한 색깔을 지켜보면서
간다 간다 :-D
공부하러 간다 :-D



+



그리고 눈.

지수랑, 학교다닐 때처럼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들었다. 그때 우리는 스무살 근처였는데 지금은 서른 다섯 근처다. 우리가 진짜 같이 공부하고 있다니 이럴 수가! 강의 듣다가 문득문득 슬쩍슬쩍, 열심히 듣는 지수 오른쪽 얼굴을 훔쳐 본다. 흐뭇흐뭇. 멋쟁이 공부쟁이 아가씨 이뻐!

두시간이 금방이다. 학교 다닐 때는 수업시간이 몇분이는지 생각이 안난다. 이렇게 짧은 두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꺄하하 웃고 떠들면서 "다음주에 만나자!" 하고 과천 정부청사역 지하철역에서 헤어지고 밖에 나오니 눈이 온다.

영화 [내가 고백을 하면] 처럼, 밖에 눈은 오고,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눈이 푹푹" 하고 예지원이 소리내서 시를 읽고 있는데, 김태우가 강릉까지 내려와 집앞에 차를 대놓고 전화해서 "나와봐요." 뭐 그런 종류의 설렘은 아니더라도, 나도 지금 눈이 좋다. 찜질방에 가는 설렘이 점점 커진다. 눈오고 비온 덕분에 몸은 더 무거운데 마침 뜨거운 물에 푸욱 담그러 가는구나 아하하!

오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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