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으로 철썩 맨살을 내려치는 것처럼 그가 버럭 소리지를 때 마다, 눈동자 바깥에서 눈꼬리 안쪽 사이에 매달려있는 투명하고 얇고 동그란 물주머니가 펑 터지는 것 같다. 눈 앞이 아득해지면서 몸 어디에선가 물이 새어 나가는 것 같다. 턱 아래 임파선에도 기관지에도 심장에도 폐에도 위에도 장에도 겨드랑이 아래에도 자궁에도 신장에도, 곳곳에 금이 가고 물이 샌다. 심장박동 리듬에 맞춰 모든 틈새에서 찔끔찔끔 왈칵왈칵.

그래서 다행이다. 이제 세상을 돌고 있는 여러가지 여러색깔의 소리를 만나러 간다. 내 몸을 통과해서 예쁜 파형을 그리고 가는 소리를 만날 수도 있겠지. 줄줄 새는 구멍이 너무 많아서 다행인건, 털끄트머리만큼 아물어가는 변화까지 읽어내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내 생명을 살리는 소리가 어떤 음인지 어떤 색인지 골라낼 수 있겠다. 물새는 구멍을 내는 소리와 구멍을 아물게 하는 소리의 차이만큼이, 바꿔낸 운명이겠다. 내 운명대로 살 수 있게 바꿔낸 조건이겠다.


+

그러고는 다시 돌아본다.
남편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거리를 이제야 제대로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이제야 원래 그랬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가는게 아닐까. 이 사람의 좋은 점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관계. 떨어져 있으면서 간간히 농사며 공동체며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아서, 가까이 있어도 좋을 줄 알았는데, 가까워진 순간부터 많이 울고 많이 아팠다.

가까워진다고 누구나 다 상처를 주고받는 건 아니겠지만, 최적의 거리를 알아가는 과정에 좀 더 시간과 정성을 차곡차곡 쏟았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 가는대로 속도를 낸 벌은, 우리가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깨닫고 관계가 무너진 채 하루하루가 되풀이 되는 것으로 되돌려받았다. 그 시간을 참고 견뎌서 받은 가장 큰 상은 우리 아이들이다. 벌을 받는 것 같은 하루, 이 벌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에도, 상은 늘 가까이에 있었고 순간 순간 새로웠다.


이사가 이틀 남았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해먹고 빨래하는 집.  (0) 2016.02.23
책짐싸기의 어려움  (0) 2016.02.17
멈추면 가라앉는  (0) 2016.02.14
속초는 눈이 푹푹  (0) 2016.02.06
꽃필 수 있는 삶으로  (0) 2016.02.01

관계가 끝나게 된 시작은, 어떤 사건들을 겪으면서, 남편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순간인 것 같다. 헤엄치다가 물장구를 멈추면 그 상태로 멈춰서 떠있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짐싸기의 어려움  (0) 2016.02.17
누수, 소리, 가장 적당한 거리.  (0) 2016.02.15
속초는 눈이 푹푹  (0) 2016.02.06
꽃필 수 있는 삶으로  (0) 2016.02.01
가는 길에 의미가 생긴다  (0) 2016.02.01

온유가 요새 즐겨 하는 놀이. 내 멱살을 잡아 앞으로 쭉 잡아당기고, 옷이 벌어진 틈으로 고개를 쑤욱 집어넣고 엄마 냄새를 "흐으읍 하- 흐으읍, 하-" 하고 맡는다.

"온유야 무슨 냄새 나?"
"엄마 찌찌, 포도 냄새! 사탕 냄새(타탕 냄태)!"


요놈, 찌찌 먹을 때처럼 황홀한 표정 :-D
온유한테도 젖냄새도 아닌 것이, 지금도 달콤한 아기 살냄새가 난다. 우리는 공생관계다. 온유가 내 냄새를 맡으러 왔을 때 나도 온유 냄새를 빨아들이고는, 둘 다 황홀해진다 :-D

+

속초에 와서 목욕탕에 다녀왔다. 또 온유가 달려들어서 멱살을 잡아 당겨 냄새를 맡는다. 이번에는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싸쥐고

"윽! 똥냄새~~~~ 고약해~~~"

'싫다' 중에 최고로 격한 표현이 나왔다 ㅋ 평소에는 향 없는 비누를 쓰는데, 속초 왔다고 울엄마 목욕바구니에 있는 바디클렌저를 썼더니 그런다. 평소 경험하지 못한 화려한 향기가 너무 싫은가보다.


+


이렇게 내 냄새를 좋아하는 생명체라니. 누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줄까. 내 삶에 이런 기적이, 이런 행운이, 이 때가 지나면 두번 다시 없을 것 같다. 몇년 더 크면 큰 형아가 되어서, 냄새를 맡으려고 하기는 커녕 뽀뽀도 안해주고 안아주지도 않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도 않을테지.

설연휴 일주일 내내 엄마랑 같이 있으면서 밤낮으로 신나게 엄마 품을 킁킁킁 파고든 온유. 찌찌냄새 맡고 도망가는걸 붙잡아서 꼭 끌어안고, 이마며 턱이며 코며 볼을 깨물고 뽀뽀를 퍼부으면, 꺅꺅 웃으면서 버둥버둥 온 몸을 뒤트는 온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쭈욱 정말 혼자만 있게 되었을 때, 내가 낳은 기적의 생명체와 닿은 순간의 따뜻한 온도와 부피와 감촉과 맛과 냄새와 소리가 문득 문득 문득 문득 떠오를 것 같다. 나는 그때마다 많이 울까.

'마주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사진  (0) 2016.04.10
우리, 달리기 할까?  (0) 2016.03.03
너무 좋아서 두근두근  (0) 2016.02.05
엄마랑 같이  (0) 2016.02.01
서른 무한잔  (0) 2016.01.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