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한켠에서 보름 나물이랑 오곡밥을 파는 걸 보고 눈물날 뻔 했다. 나물을 보니 보름이구나, 한다. 올해는 찰밥 못먹고 지나가네. 마을회관에서 찰밥에 김싸서 대보름 나물이랑 동태찌개 한그릇씩 먹고. 노랑 파랑 빨강 끈매고 마을풍물패가 모여서 탑고사도 지내고, 새로 이사온 집 지신밟기도 하고. 어스름 저녁에 마을사람들 모두 모여서 달집도 태우고. 타는 달집을 가운데 두고 논을 빙빙 돌면서 나는 왼손 새끼손가락 등이 다 까지도록 정신줄 놓고 장구를 치고. 은희언니가 부르는 흥겨운 가락, 절절한 가락도 듣고. 어른들이랑 아이들이랑 뜨거운 오뎅을 배터지게 먹고, 쥐불놀이 깡통 돌리다가 누가 잘 날려서 별 무지개를 예쁘게 만드나 보고. 그런 시간 속에 있었다.

올해도 그랬겠다. 탑고사 한다고, 달집태우기 한다고, 치복 입고 마을회관으로 모이라는 정임언니 문자를 받았다. 솔멩이골은 대보름. 멀리서 날아온 문자가 참 고맙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씨 일가 총출동  (0) 2016.02.26
상냥 저축  (0) 2016.02.24
밥해먹고 빨래하는 집.  (0) 2016.02.23
책짐싸기의 어려움  (0) 2016.02.17
누수, 소리, 가장 적당한 거리.  (0) 2016.02.15

책보따리 옷보따리 쌀한자루만 택배로 부치고 이사를 마쳤다. 필요한 건 여기에서 다 새로 마련하고 있다.

+

첫날에는 이불이랑 샴푸린스랑 수건을 사왔다. 따뜻한 물에 씻고 이불 덮고 잘 수 있어서 그날은 그걸로 충분했다.

다음날부터 팔 걷어붙이고 사람 사는 집에 있어야 하는 걸 갖추는데 시간을 보냈다. 중고 냉장고랑 중고 세탁기를 사려고 재활용센터 몇군데 가서 알아보다가, 작은 집에 들어가는 제품이 거의 없을 뿐더러 있어도 상태가 험해서 서글퍼졌다. 그래서 "멀리 봐야지. 십년은 내 살림으로 가지고 다닐거야!" 하고 새걸로 마련했다. 밥그릇 국그릇 접시랑 칼이랑 도마랑 냄비랑 밥 해먹을 압력솥을 사고, 도시가스를 떼고 (부엌에 후드가 없다) 전기렌지를 샀다. 공구랑 전동드릴을 쓸 일이 꽤 있는데 어디 빌려달라고 할데가 있어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어렵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일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서 것도 주문했다. 그것 말고도 소소하게 필요한 것이 매일 생긴다.

전동드릴을 주문하고 나니 너무너무 설렌다. 그동안 남편이 있어서 남편이 다 했지 나한테까지 올 기회는 없었다. 굳이 애써서 해볼 마음도 없었고. 이제는 모두 내 일이다. 나 이제 내 전용 전동드릴과 공구함을 가지고 무엇이든 스스로 풀고 조이고 고치고 뚫는 진정한 공대여성이 되는거다. 아하하하!

+

필요한 걸 찾아보면서 그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꽤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계속 뭔가를 찾고 읽고 비교하느라고 눈이랑 신경을 많이 써서 금방 체력이 바닥난다. 또 한편으로는 '내 인생에 이렇게 살림을 처음부터 싹 새로 마련할 일이 또 있을까. 지금 이 시간이 정말로 큰 흐름이 바뀌고 있는 시기인가?' 싶어서, 여기까지 와놓고도 문득문득 이 모든 상황이 잘 믿어지지 않고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

냉대하가 계속이다. 많이 걷고, 잘 못먹고, 무거운걸 메고 들고, 계속 뭘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기운이 많이 새나가면 안되는데. 아직은 정리할 것이 많이 남았다. 할 수 있는 만큼 얼른 정리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살아보려고 ^^ 자기 전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무극보양뜸 혈자리에 뜨는데, 등에 있는 건 혼자 못하니까 앞쪽에 있는 혈자리만 한다. 자궁이 가까운 중극이랑 수도에 뜸을 뜨면 아랫배가 금방 따뜻해져서 기분도 좋아진다. 뜸을 뜨니 잠이 꿀맛이다. 눈 감고 머리를 대면 순식간에 잠에 훅 빨려들어가서, 정말로 죽었다 살아나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는다.

+

집이 너무 춥다 ㅠㅠ 몸이 시려서 옷을 세겹 입고 있어도 춥고 어디선가 계속 바람이 분다. 왜 이렇게 웃풍이 센가 하고 둘러봤더니 부엌에 엉성하게 걸린 선풍기 날개모양 환풍기 아래를 골판지 한장이 가리고 있는데, 골판지가 다 가리지 못한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골판지를 슥 잡아빼봤더니 방충망이 있는 바로 바깥이다. 그러니까, 골판지 한장이 대충 가렸지만 결과적으로 바깥하고 집안하고 온도가 같았던거다 ㅠㅠ 밖에 바람불면 집안에도 바람이 불고 ㅠㅠ 한지를 사와서 몇겹 발라봐야겠다.

+

밥해먹을 수 있는 조건이 안갖춰져서, 살림마련하고 오가고 밥사먹는데 매일 돈을 쓰고 있다. 돈을 벌지도 않는데 계속 써서라기 보다는, 돈을 쓰고 있는 자체가 마음이 불편하다. 시골에서는 지갑 안가지고 다니고 빈몸으로 몇달을 너끈히 살고, 쓰는게 드문 일이었다. 도시에서는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에 돈이 든다. 예상보다 많이 필요했다. 가지고 있는 생활비가 금방 바닥날까봐 겁난다.

겁이 나면 얼른 다르게 생각해본다. '한사람이 혼자 살아가기 위한 환경을 새로 만드는데 이정도도 안들어가겠어', 한다. '밥을 해먹는 집과 밥을 사먹는 집은 필요한 살림이 다르지. 나는 일하고 돈벌고 공부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무엇보다 건강하자. 그러니 어차피 필요한거 얼른 얼른 갖춰놓고 밥을 잘 해먹고 살자', 한다. 일단은 그정도만.

+

결혼생활하면서 좋으나 싫으나 삼시세끼 꼬박 밥해먹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 감사하다. 혼자있으면 잘 안먹고 잘 못먹어서 병이 날 뻔한 미래를 바꿔준 나날들에 감사한다.

이제 새 집에서 내 손으로 지어먹는 첫 끼니를 내일 아침에 먹는다. 현미잡곡도 불려놓고, 콩나물이랑 미역이랑 순무김치랑 사오고, 김도 있다. 새 그릇에 새 컵에 새 밥솥 새 냄비에 밥해서 먹고 힘내자. 세탁기도 온다.

밥해먹고 빨래하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면서, 이곳에서도 잘 지내보자. 홧팅.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냥 저축  (0) 2016.02.24
솔멩이골 정월대보름  (0) 2016.02.23
책짐싸기의 어려움  (0) 2016.02.17
누수, 소리, 가장 적당한 거리.  (0) 2016.02.15
멈추면 가라앉는  (0) 2016.02.14

이제 책 두박스 쌌을 뿐인데
피로가 몰려온다.

가져갈 책만 고르려고 내용 훑다가
펼친 책마다 정독하고 있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솔멩이골 정월대보름  (0) 2016.02.23
밥해먹고 빨래하는 집.  (0) 2016.02.23
누수, 소리, 가장 적당한 거리.  (0) 2016.02.15
멈추면 가라앉는  (0) 2016.02.14
속초는 눈이 푹푹  (0) 2016.02.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