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은 여름방학을 맞아서 이미 속초에 가있고

나도 월화수 휴가내고 내려갔다.

 

밤에 자려고 셋이 나란히 누웠는데

이놈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방패삼아서

서로 주먹을 날리고 꼬집고 발로 차면서 싸운다.

 

더 세게 맞은 한 놈이 눈물을 쏟아야 끝나겠다 싶어서

말로 하는 놀이를 제안했다.

 

나 : 동물이름대기 게임하자!

한결 : (시큰둥) 응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해.. (반대로 돌아누움)

온유 : (역시 시큰둥) 응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해.. (반대로 돌아누움)

 

나 :

아아 뭐야! 이제 컸다고 시시해진 거야?

엄마부터 한다. 고래!

 

그리고 마지못해 한바퀴 돌고 나서는 불이 붙어서

지쳐서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훗 땅꼬마들이 다 큰 척을 하다니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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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온유네 학교에서 경복궁으로 단체 나들이를 왔다.

나 :
엄마 회사가 경복궁 코앞이야!
부르면 10분만에 갈 수 있었는데
왜 엄마 부르지 않았어?
보고싶었는데 >_<

온유 :
안그래도 엄마한테 얘기할까 했는데,
그럼 엄마가 "갱얼지~~~" 하면서
사람들 많이 있는데 나를 부르면서 찾아올 것 같아서
얘기 안 했어.
(하이톤으로 엄마 성대모사를 함 ㅋㅋㅋㅋㅋㅋ)

나 :
어머나!
엄마가 그렇게 부르면 부끄러워?

온유 :
응. 당연하지.

나 :
근데 어떡하지!
온유는 엄마의 갱얼지인데!
내 갱얼지 맞는데! (억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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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에 지관서가 독서모임에서 SF를 같이 읽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야심차게 신청했다. SF를 읽는 사람들이라니. 얼마나 드물고 귀하고 존재 자체로 고마운지.

이 모임을 하려면 독후감을 써야 한다.
쥐어짜고 쥐어뜯으면서 썼다.

부끄럽지만 아무튼 쓴 것에 의의를 둔다 =_=

+

지관서가 책 읽는 저녁#13 /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옥타비아 버틀러 / 2023.1.25.(수)

소설 속 일기의 시간대는 2024년 7월부터 2027년 10월까지다. 미래에 기후변화로 물과 물자가 바닥난 상황에서 2024년부터 26년까지는 마을을 지키는 장벽 안의 이야기이고, 27년은 약탈자의 습격으로 마을이 불타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30년 전에 쓰인 소설 속 미래의 환경, 정치, 경제적 상황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놀랍다.

마을 사람들은 바깥의 침입을 막는 폐쇄된 장벽 안에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며 자급자족에 가까운 방식으로 서로를 지키고 돌보고 가르치면서 불안과 공포를 견뎌왔는데, 그렇게 지켰기에 지역 전체가 훌륭한 약탈의 대상이 된 것이 아이러니였다. 마을 전부가 불타고 공동체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언제든 이렇게 될 수 있던 상황이 기어이 오고야 만 것에 마음이 아팠다.

마을공동체가 언제든 약탈당할 수 있는 땅과 집에 기반을 두었을 때는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영구적인 대안이 될 수 없겠지만, 이 생존방식을 시도한 의미는 살아남은 로런, 해리, 자라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된다. 혼자 살아남을 수 없는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돌보고 가르치면서 함께 살아남는다. 계속해서 유연하게 변하면서 공동체는 새로운 생을 이어간다.
- 나는 그 말을 하는 자라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자라가 말하지 않은 본심을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우리랑 같이 갈래요?” ... 자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나도 같이 갈게.”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p.300, 빈털터리 자라가 받아들여졌다 느꼈을 때)
- 어쩌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악몽에서 벗어나는 치료제일지도 몰라요. (p.454, 저스틴이 받아들여질 때)
- 세상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버렸어요, 질. 우리까지 그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서로 지켜주는 수밖에 없어요. (p.509, 너무나 절박했고 그래서 위험하기까지 한(p.501) 에머리와 토리가 받아들여질 때)

쓰고 보니, 내가 인식하는 현실세계도 디스토피아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내 하루도 소설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맞서 하루씩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투와 닿아있는 것 같다. 살아남고 싶다. 누구도 내 불안과 행적을 모르게 하고, 어딘가에서 가만히 살아있고 싶다. 불안의 종류가 달랐던 지난 시절은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밥을 먹고, 따뜻한 물에 씻고, 오늘을 기록하고, 조용한 잠자리에 누워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빈 마음으로 눈을 감으면서 오늘의 불안을 내일로 미룬다. 풍족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면 충분하고, 세상에 뭔가 기여하는 것도 없이 하루살이가 고작이지만 계속 살아가고 싶다. 약자이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도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성한 몸과 성한 마음으로, 내 힘으로 내 앞가림을 하는 나날이 무사히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여기에서 얼마나 더 머무를지 알 수 없어도 지금보다 더 깊은 바닥으로는 내려가지 않았으면(p.583)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느슨하게 연결되어 이따금 소식을 전하면 좋겠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처럼 혼자만의 분투, 이따금의 연결만으로는 살아남기에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은 변화다. 그 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서, 운명에서 찾아야 한다.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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