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샘^^ 오늘 집 보러 다녀볼래요? ^^"

오늘도 집구하는 어플을 검색검색하다가 시무룩해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는 나는, 붕붕샘 한마디에 자리를 박차고 발딱 일어나서 후딱 나갈 채비를 했다. 남양주시에서부터 차를 몰고 나를 만나러 오는 고마운 붕붕샘. 오랜만에 얼굴 볼 생각에 마구마구 신이 나가지고, 데이트할 때나 할 법한 꽃단장을 했다. 고데기로 머리펴고 얼굴에 이것 저것 펴발라 다다다 두들기고 치마를 입고 ㅋ

오늘은 의왕 내손동쪽이랑 안양 관양동쪽을 둘러보았다.부동산 중개사가 보여주는 대로 온 동네를 걸어다니면서 이 잡듯이 샅샅이 훑어보았다.

가진 돈이 많지가 않다. 예산은 300/30. 나는 반지하나 1층은 안되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이 집은 괜찮지 않냐"고, "이 집은 어떠냐"고 하면서 반지하랑 1층 집을 몇개나 몇개나 보여줬다. 중개사도 이 가격으로는 수가 없었나보다. 이 가격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을 되도록이면 많이 보여주느라고 애쓰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집이었다. 어떤 집은 들어가는 순간 하수구 냄새가 역했고. 어떤 집은 화장실이 씻고 싶기는 커녕 발도 들이기 싫을 만큼 오래되고 지저분했고. 어떤 집은 생크대가 너무 낡았거나 음식을 해먹을 때 환기를 할 수가 없었고. 어떤 집은 대로변에서 바로 문을 열면 방인 집이었고 (누가 거기 산다는 걸 길에 있는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집). 어떤 집은 샌드위치 판넬로 화장실을 만들어서, 천장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어떤 집은 곰팡이 냄새가 훅 났다. 이 집들은 창문 높이가 눈높이라서, 창문을 열면 바깥에서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옥탑방도 봤다. 어떤 방은 주인집이랑 연결된 복층방 옆에 붙어있는 방이었는데, 주인집이랑 연결된 방은 방범창이 되어있는데 세놓은 방은 방범창이 없었다. (이걸 붕붕샘이 발견하고 얘기해줬다) 구조도 누구나 옥상에 올라올 수 있는 구조였다.
어떤 옥탑방은 계단을 올라오면 한집인데 계단 양쪽으로 문이 두개였다. 한 문은 철문인데, 한 문은 간유리가 있는 옛날철문. 유리를 깨고 문을 따면 바로 열리는 집이었다. 창에 방범창도 없었다. 보여준 옥탑방은 모두 남자가 혼자 살던 집이라고 했다. 남자는 이런 집 안 무섭나?;;

본 집중에 그나마 욕실도 싱크대도 깨끗해서 괜찮았던 2층집은, 복도를 따라 여러개의 방이 있는 다가구 주택의 가운데쯤인 방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습기가 훅 끼쳐왔다. 중개사가 대번에 "아이구 습해! 안 되겠어. 여기서는 못살겠네!" 했다. 들어가면 왼편에 싱크대, 정면에는 욕실겸 화장실, 오른쪽 문을 열면 방이었다. 환기를 시킬 수 있는 곳은 방에서 복도쪽으로 난 창문 딱 하나였고, 꼭 닫혀 있었다. 왜 그렇게 습했을까. 습하게 해두고 살고 있을까. 집에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됐다. 복도쪽으로 난 창은 안전하지 않고, 더구나 이 집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이었다. 여름은 어떻게 났을까. 마음놓고 열어둘 수는 있었을까. 빨래는, 며칠을 두어야 마를까.

오늘 본 다가구 주택의 원룸들은 내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 작정하고 뒤따라오면 멀리서도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환기를 시키거나 빨래를 마르게 하려거나 더워서 창문을 열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동네도 안전한 집은 있다. 공동현관에 비밀번호가 걸린 원룸도 있고, 아파트도 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그런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일 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그나마 많은 부분은 안전한 것 같다. 창을 다 열어도 앞 집에서 우리집 베란다는 나무에 가려서 안보인다. 햇볕에 빨래를 널 수도 있다. 길가에서 우리집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니 그 빨래는 여자 꺼라는 것이 노출되지도 않는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바깥의 아무도 보지 못한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이 하나하나가 사실은 굉장한 거였다.

하지만 완전히 안전하다고도 하기는 뭐한데, 가끔 밤에 누군가 우리집 현관문 손잡이를 슥 돌려서 문을 열려고 한 적이 있다. 몇 번이나 있다. 처음엔 소름이 쫙 돋았다. 불도 다끄고 사람 없는 척 숨을 죽였는데, 이중삼중으로 다 잠그니까 안 열릴거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신경 안 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생활 패턴이 있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퇴근길이 신경쓰일 것 같다.

오늘 얻은 큰 성과. 붕붕샘이 같이 집을 돌아봐준 덕분에 알게된 건, 내가 가진 돈으로 이 근처에서 혼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깨끗한 집을 구할 수 없다는 것. 무려 네 시간을 쉴 새 없이 걸어다니고 나서, 결론을 내린다. 막연하게 '가까운데도 집이 있겠지' 했던 희망을 잘 접었다. 집을 고를 때 고려할 것이 도배, 장판, 싱크대, 화장실, 방 크기와 구조, 위치와 교통, 채광과 환기, 이런 건 안전에 비하면 옵션이 된 것 같다. 나 혼자서도 안전한 집에 살기 위해서,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과한 걸까.

어찌나 다리근육 심폐근육을 열심히 썼던지, 국 하나만 있으면 밥을 다 먹는다는 붕붕샘이, 저녁에 "나 돈까스가 먹고 싶어요.." 했다 ㅋ 풀샘이랑 같이 만나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돈까스를 먹고, 입술이 다 부르트게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헤어지기 아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오늘도 엄청나고 굉장한 날이었다.


이제 또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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