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살림노동을 참 잘한다. 

결혼 전에 에코페미니즘 학교를 함께 수강했는데,

그때 살림노동이라는 개념을 함께 정립할 수 있었다. 


입을 옷을 세탁하고, 먹을 밥을 짓고 

흔히들, '집안일'이라는 말로 그 의미가 한정될 때가 있는데,

이 노동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파괴될 수 있다. 

(갈아입을 속옷이 없고 신을 양말이 없고, 굶다가 쓰러지게 됩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노동인 것.

살림노동, 임금노동은 둘 다 꼭 필요한 노동이니

중요성의 경중을 나누는 것은 의미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살림노동을 성별로 분담하는 게 

고착화되어 있는데 (집안일은 여자가...?) 

서로 상의하에 역할을 분담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 


우리는 살림노동의 위상도 재정립하고 상의하고 역할도 나누었다.


- 사쁘나 샘, 2018.1.28




쁘나샘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진화한, 거기다 실시간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가장 진화한 형태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비법을 물어봤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사는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는데

이건 진짜 너무나 너무나 부러워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비법인 즉슨,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학교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개념들을 배웠다고 한다.




+




나도 이혼하기 전에 

임금노동과 그림자노동에 대해

남편한테 얘기했다. 여러 번.


내가 하는 일이 돈을 벌어오는 일은 아니어도

똑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엄연한 경제활동이라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같이 하고 있는데

단지 돈이 되는 일과 안 되는 것이 있는 것 뿐이라고.


집에서 해야하는 일이 원체 많고

육아까지 합하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으니

할 수 있는 만큼 나눠서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보통의 가부장적인 부산 남자였다.


그의 세계에는 단지 집일과 농사일,

딱 이렇게 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농사일 마치면 저녁시간에는 

늘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운전하고 와서 바로 잤다.

자기가 쓴 치실 하나도 쓰레기통에 넣지 않았다.

자기가 먹은 술병 하나도 자기 손으로 치우지 않았다.

농번기는 이해해도, 긴긴 농한기에도 마찬가지.


이런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나는 마치 아이가 볼모로 잡혀있는, 무임금 노동하는 파출부 같았다.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그 사람은, 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 사람은, 그 사랑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돈은 자기가 버니까,

관리하고 쓰는 것까지 모두 자기만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편하게 노는 줄 알고 있었다.


얼마를 버는지, 혼자서 얼마를 쓰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니까 "니가 왜" 라고 했다.


한 때 초창기에 잠시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는 일주일에 10만원씩 현금인출기에서 꺼내 썼고

물어보니 어디에 썼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통장 내역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생활비로 쓸 현금도 주지 않았다.

카드는 현금인출이 안 되었고

마트에서 장 볼 때만 썼다.

정말로 밥만 먹고 살았다.

시골이니까 그렇게도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결혼 전부터 있던 빚도 갚고

차도 바꾸고

집도 지었다.


나는 결혼 전에 저축해둔 돈을

생활에 전부 다 써버렸다. 

잔액이 0원이 되고 나서는 일해서 벌어 썼다.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결혼기간에 힘들게 열심히 일했는데,

정말로 간신히 밥만 먹고 살았고

내가 모아놓은 돈은 급할 때 야금야금 쓰고

집 짓는데 써서 바닥이 났다.


같이 노동했는데

나는 가난했고 더욱 더 가난해지고

그의 생활기반은 자리잡혔다.




살림노동과 임금노동의 개념이 없는

한국의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이 걸, 내 삶을 갈아넣어가면서 겪었다.



+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옛날 아줌마들은 애 업고 밭 갈았다는 얘기를 하면

(남들 다 하는 거 너는 왜 이리 못한다고 유난이냐는 뜻)

마을 형님들은 남편한테 정색하고 한마디씩 했다.


우리도 너무 힘들었다고.

아이 키울 때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서

그 시절이 지옥같고 힘들었다고.

ㅁㅁ씨 얘기처럼 그런거 쉽게 하면서 산 사람 

여기 아무도 없다고.



+



집을 나올 때 빈 몸으로 나왔다.

문헌정보학 공부하는데 필요해서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남편이 그렇게까지 악독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젠더의식이 너무 부족했던 건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결정적으로 잘못한 건

다른 자신이 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다.


뭘 원하는지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고는

나를 비난할 말을 찾느라 요점에서 벗어난 말로 맥락을 흐리고,

갈등상황을 이야기로 풀면서 이해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잔소리쯤으로 여기다 별안간 버럭 고함을 쳤다.

완고한 자신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A부터 Z까지 내 탓이었다.



유난히 아내의 고통에 공감능력 없음. 

편견이 쌓인 견고한 아집.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음.

거기서 누적된 문제가 터졌을 때

갈등을 폭력으로 내리누르려 한 것.


그 견고함 앞에 

나 혼자서는 너무 무력했다.


남자아이 둘을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서 

몸이 늘 피곤하고 아팠는데

마음은 늘 더 아파서

뭐가 더 아픈지 구분을 못해서 

괜찮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나의 실수는

결혼 전에 충분히 결혼 후의 삶을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결혼한 여성이 고통받고 불행해지는 불합리한 사회구조며 의식구조를 

결혼 전에 같은 여성으로서 눈뜨고 보지 않은 것이다.

결혼이 현실이란 걸 못 보고 낭만에 취했고,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다.

 

진화한 남자를 선택하지 못했고,

진화하지 않았다면 

진화할 잠재적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괜찮은데

진화할 잠재적 가능성도 없었고,

아예 진화를 거부하는 남자를 택한 것이다.


내 잘못이다.

이 사람을 택했을 때 이렇게 살게 될 거라는 걸

선택하는 그 때에 내다봤어야 하는 거였다.


이런 남자를 선택했으니

눈물바다에서 살 수밖에 없던 거였다.


같이 살자마자 이런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

첫 아기 백일 즈음 변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을 때,

둘째 아기 가지기 전에 이혼을 결심했을 때,

그 때마다 정리할 수 있었다.

기회는 그렇게 틈틈히 있었다.


괜찮아지겠지 하고 안일했던 내 잘못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데 그걸 정확히 못 보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통하지 않는 걸 알고도,

고비가 지나고 죽을 것 같지 않으니까 

막연하게 낙관했다.


그때 바로 박차고 나와서 임금노동으로 돌아갈 

용기를 냈어야 했다.

아닐 것 같으면 애저녁에 정리했어야 했다.

때가 왔을 때 정리하지 않고 넘겼으니

시간이 가면서 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게 당연하다.


몸과 마음이 탈진할 때까지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견딘 것도 나를 과신한 거다.


상대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가는지 지켜보고,

결혼과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나와 맞춰갈 수 있는지를

좀 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탐색했어야 했다.



 


아내를 세상 우습게 아는 문화가 몸에 배었고,

그 문화를 의심하고 바꿔갈 의지가 없는 사람과 결혼한 것도

애초에 잘못이다.


가부장 성향 강한 경상도, 

특히 부산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이 

주변에 정말로 단 한 사람도 없는데

이런 걸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보아온 대로, 살아온 대로 살 뿐이고

앞으로도 나한테 맞춰서 변할 생각 없고,

나는 그걸 참고 견디고 살지 못하는 거다.


그 뿌리깊은 문화의 차이, 세대의 차이가
개인 성향이라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 잘못이다.
개인 성향만도 아닌데, 극복할 의지조차 없을 줄이야. 
얼마나 낭만에 눈이 멀었던 거냐, 나.

결국 자신의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 
순간의 감정을 가지고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랑받은 게 아니다.
사랑은 자기를 멸망시키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라는 것도
더 나중에 알았다.
사랑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 잘못이다.


+



우리의 이혼사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



그리고 다행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상대가

페미니즘을 몸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혼이고 연애고

여성에게 해롭고 위험하다.


오직 진화한, 

진화의 가능성이 있는,

진화 중인 상대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태로

계속해서 이끌어주는 것.

그게 사랑의 기술인 걸, 생존의 기술인 걸,

사쁘나 샘한테 배운다.



나도 계속 다른 내가 되도록,

귀 열고 마음 열고 타인의 아픔에 연대하면서 진화해야지.

다시 시작이다.

다음엔 제대로 사랑할거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근 첫날  (0) 2018.02.21
새 환경에 새 몸  (0) 2018.02.20
나는 다만 나만 어쩔 수 있다  (0) 2018.02.11
진작 씻기  (0) 2018.02.11
합의되었음이 틀림없음을 확인합니다  (0) 2018.02.09

+ Recent posts